나의 이야기

출근길 차 안의 철학 이야기

검하객 2015. 11. 23. 11:07

 

성과사회는 금지를 명령하고 당위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와 달리 전적으로 할 수 있다라는 조동사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생산성이 어느 지점에 이르면 해야 함은 곧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해야 함할 수 있음으로 대체된다. 착취를 위해서는 동기 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것이 채찍이나 명령보다 더 효과적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명령하고 착취하는 타자에게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만, 결코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체는 자기 자신을, 그것도 자발적으로, 착취하기 때문이다. 착취자는 피착취자이기도 하다.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에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구조는 자유로우라는 역설적 명령문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명령은 성과주체를 우울증과 소진 상태 속에 빠뜨린다.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는 엄청난 강제를 낳으며 성과주체를 심각하게 망가뜨린다. 성과주체는 자가 발전된 강제를 자유라고 여기며, 강제를 강제로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자신의 강제 구조를 개개인이 누리고 있는 가상의 자유 뒤로 숨긴다. 그 속에서 개개인은 스스로를 더 이상 예속된 주체가 아니라 기획하는 프로젝트로 이해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간계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 지성사, 2015, pp.29-31.

 

한병철은 한국에서 대학을 나왔지만, 이후 독일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독일어로 글쓰기를 하는 철학자이다. 이 구절을 두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관념적인 걸, 이런 걸 철학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겠지. 한국에선 이런 글이 나오기 어려운 거 같아."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 철학적 글이 나오기 어려워." "그럼 우리 사회엔 철학이 없는 건가? 그건 너무 위험한 현상이잖아?" "그런 셈이지." "왜? 이유가 뭐지?" "환경 문제인 거 같아. 그리고 글쓰기 교육의 틀 자체가 이런 글을 허용하지 않아." "어떤 틀?" "효율성과 조건의 지배가 너무 심하다고나 할까?" "자유를 허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당신이 이런 문제를 제기해보지 그래?" "나? 내가 뭐 철학자인가?" "철학자만 철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철학이 없는 사회의 반영 아닐까?" "그런가?" "사실의 배후와 현상의 이면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이런 글이 필요해, 이건 철학자의 사안이 아니라 라 전체 사회구조의 문제야." "---" 아침 출근길 차 안에서 오랜만에 잠깐 철학적 사유라는 걸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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