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통발에 갇힌 대학 (김율, 경향신문 1. 22)

검하객 2016. 1. 23. 11:41

 나는 통발 속 물고기의 비늘 하나, 또는 지느러미일 뿐이다. 

 

 지난해부터 대학가에서 프라임사업 열풍이 일고 있다. 산업수요에 부응해 대학 학사과정을 융복합 교육 중심으로 개편하고 구조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것이 이 사업의 취지다. 교육부발 프라임 열풍이 가져온 결과는 사실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취업률에 따른 학과 통폐합(구조개혁)이야 이미 오랫동안 진행돼 왔으니까.다만,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학문 관련 학과들이 이미 충분히 멸종되어서, 폐지하고 싶어도 더 이상 폐지할 것을 찾기 힘들게 되었다는 게 대학의 애로라면 애로겠다.
  프라임사업의 좋은 점은 이 문제의 해법까지도 친절하게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즉, 남아있는 기초교양이나 학과 단위 교육과정의 칸막이도 마저 부수어, 무엇이든 좋으니 현장 기업이 필요로 하는 ‘직접적 직무능력’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간 모두가 복창하면서도 아무도 명쾌히 이해하지 못했던 ‘융복합형 인재 양성’ 구호의 시나브로 드러난 뜻이니, 대학이 직업훈련소로 전락했다는 섣부른 자조는 멈추고, 이제 대학에 개설된 과목 하나하나가 어떤 직군의 어떤 직무능력과 관련이 되는지 따져보며 융복합 특성화를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국문학과와 전자전파공학과를 통합해 웹툰창작학과로 만들겠다는 모 대학 부총장의 말이 웃음거리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소극(笑劇)도 때로는 절박할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 소극인 줄 모를 리 없는 대학은 왜 ‘융복합 소극’을 이토록 절박하게 연출하는 것일까?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줄어드는 ‘입학자원’ 앞에서 재정 압박을 겪는 대학 처지에서 수십억원에 이르는 지원금 대박의 유혹을 어찌 모른 체할 수 있겠는가.
  교육부 사업에 맞춰 거의 매년 대학들이 허겁지겁 바꿔대는 학사구조는 교육이나 학문의 논리가 아니라 오로지 돈의 논리에 의한 것이다. 물론 대학도 돈이 있어야 생존한다. 문제는 대학이 돈에 중독돼 가장 단순한 물음의 능력조차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왜 생존해야 하는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능력만을 가르치고, 그것을 잘해 ‘교육부가 인정한 대학’이라고 광고해 스스로 생존을 도모하는 대학에 이 물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교육부가 주는 지원금은 그 투명함의 값이다. 각종 공모전, 전시회, 특강, 회의를 개최하고 심지어 그 성과 공유를 위한 전시회를 또 개최하면서, 전주(錢主)에게 증빙할 자료집과 보고서를 숨 가쁘게 작성하고 나면, 생존 이유에 대한 예의 물음은커녕 ‘이 돈이 생존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었을까’라는 최소한의 계산적 합리성조차 발휘하지 못하는 가축의 삶이 완성된다.

  정부는 왜 굳이 세금을 들여 대학 구조조정과 학사개편 같은 것들을 유도하는 것일까? 시장 개입이라는 억울한 오해까지 무릅쓰며 ‘대학의 자율적 구조조정’을 지원하겠다는 정부의 뜻이? 예컨대, 아직도 순수학문을 공부하겠다는 소수 지망생들이 한때의 치기로 인생을 망치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어서? 아니면 제 전공만 잘난 줄 알고 고집 부리는 어리석은 교수들의 실직 사태를 미리 막아주기 위해서? 혹시라도 교육부가 공문에서 그렇게 썼듯이, 창조경제를 견인하기 위해서?

  통발 주인의 숨은 뜻을 물고기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적어도 대학의 존재 이유 운운하며 연례 소극에 정색하고 질문 던지는 맨 정신을 원하지 않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겠다. 정부는 대학의 평화를 참으로 바랄 것이다.

  평화를 깨야 한다. 비판적 교수를 해직하고 교련을 가르치던 독재정권의 대학 통제보다 이 평화의 통제는 더 견고해질 것이다. 때를 놓치면 안 된다. 획일적 특성화와 묻지마 융복합의 잔칫상을 뒤엎을 용기와 차분히 가난을 수용할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이 대학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통발은 이미 가득 차있다.

  아귀다툼에서 빠져나와야 비로소 헛헛하게 깨달으리니, 통발 주인은 결코 물고기를 위해 통발을 놓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