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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세 제자, 子路와 顔回와 子貢

검하객 2016. 8. 8. 00:49

  공자는 선생이었고, 전공은 예법이었다. 신과 선조에 대한 제례, 신분과 계급에 따른 상례, 군신 사이의 의례 등등, 국가가 발달하면서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되는 예법, 전례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다. 공자는 이러한 예법을 탐구하고, 그것을 통해 국가 운영의 이상과 방법을 제시했던 학자이자, 이를 여러 제자들에게 가르친 선생이었다. 예법은 법 아닌 법이고, 이념 아닌 이념인지라, 별 거 아닌 듯하지만 체제 및 제도와 긴밀하게 연동된다. 제자의 수가 3천이라고 했지만, 이는 재전 삼전 제자를 포함한 수치일 것이다. 그중 현철한 제자가 72명이라고 했는데, 그중에는 9살 차이밖에 안나는 子路도 있고, 5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제자들도 꽤 있었다. 아마 이들은 재전제자일 것이다. 선생 공자에게, 제자들은 매우 든든하면서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중에는 취직을 못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하는 언행마다 거슬리는, 손주같은 이들이 포함되었다. 이 많은 제자 중에서 자로와 안회와 자공은 조금 더 특별했다.  

 

공자의 세 제자, 子路顔回子貢

 

 

제나라에서 노나라에 80명의 미인을 보냈다. 季桓子는 이를 받았다. 군신이 가무에 탐닉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공자는 계씨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郊祭를 지낸 뒤 계씨는 제육을 공자에게 보내지 않았다. 노나라에서 더 이상 쓰이기 어렵게 된 것을 직감한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周遊 列國에 나섰다. 기원전 497, 공자의 나이 55세 때이다.

공자는 나라에서 머물고 있는데,(하남성 駐馬店市 上蔡縣) 나라가 (周口市 淮陽縣)나라를 쳤다. 이에 초나라에서 진을 구원하는 군대를 내어 城父(亳州市)에 주둔하고 있었다. 공자가 진과 채의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초나라 왕은 사람을 보내 공자를 초빙했다. 진과 채의 대부는 공자의 무리가 대국 초나라에서 쓰이는 것을 꺼려하여 노역자들을 보내 그 일행을 에워 오도 가도 못하게 했다. 식량이 떨어져 일행 중에는 기동을 못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子路(54)가 불같은 성격을 참지 못했다. “군자도 곤궁함을 겪습니까?” 공자는 이 제자가 제일 불편했다. 나이 차이도 많지 않고, 워낙 다혈질이었기 때문이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군자는 곤궁함도 편안히 여기지만, 소인은 곤궁하면 행실이 흐트러진다네.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조금 고생했다고 대놓고 눈을 부라려? 공자의 말에는 자로에 대한 얼마간의 노기가 묻어있다. 말에서 불편한 기색이 묻어난다.

제자들의 낯빛을 둘러보는데 子貢(32)의 표정도 별로다. 능력도 있고 성격도 원만하여 늘 실질적인 힘이 되는 제자이다. “, 자넨 내가 박학다식하다고 생각하는가?” 박학다식한 사람이 이런 곤란을 초래했다고 화가 난 것이냐? 이런 질문이다. “그렇습니다, 아닌가요?” 반문에서 왠지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를 느끼며 공자가 말했다. “아니야, 나는 一以貫之할 뿐이지.” 나는 바른 한 길[正道]을 가는 사람이고, 그러다 보면 이런 일도 겪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공자는 제자들이 화나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子路를 불러 물었다. “시경에 물소도 범도 아니면서 빈 들판을 헤매누나란 구절이 있다네. 우리의 도가 틀린 것인가? 우리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 자로가 말했다.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않으니 우리가 어질지 않은가 봅니다. 사람들이 우리로 하여금 도를 펼치게 하지 않으니 우리가 지혜롭지 않은가 봅니다.” 공자가 말했다. “그런가! 그런데 , 어진 자라고 꼭 신뢰를 받았다면 백이 숙제가 어찌 있었을까? 지혜로운 자가 반드시 도를 펼쳤다면, 왕자 비간 같은 사람은 없었을 걸세.”

자로가 나가자 子貢이 들어와 뵈었다. 똑같은 질문을 하자 자공이 말했다. “스승님의 도는 너무 커서, 천하가 도저히 스승님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스승님, 조금만 낮추시지요!” 공자가 말했다. “사야, 훌륭한 농부가 씨를 잘 뿌렸다고 수확이 좋으란 보장은 없고, 뛰어난 목공이 정교하게 만든 기계가 다 유익하게 쓰이지는 않듯이, 군자가 도를 닦아 그 벼리와 줄기를 잘 세웠다고 세상에 모두 수용되는 건 아닐세. 자네는 자네의 도를 닦지 않고 세상에 용납되기를 구하고 있는가! , 뜻이 멀지 않구나!”

자공이 나가자 顔回(33)가 들어와 뵈었다. 공자가 똑같이 묻자, 안회가 대답했다. “스승님의 도는 너무 커서 천하가 담아볼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도 스승님께서는 밀고 나가 시행하십시오. 담기지 않은들 뭐가 문제이겠습니까? 담기지 않은 뒤에야 군자임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도를 닦지 못하는 것이 창피할 뿐입니다. 도가 이미 크게 준비되었는데 그게 쓰이지 않는다면, 이는 나라를 운영하는 자가 못난 것입니다. 담기지 않은들 뭐 문제인가요, 담기지 않은 뒤에라야 군자임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공자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안씨의 아들이로다! 부자가 되면 나를 써다오!”

이 상황에서 공자는 子貢을 초나라로 보냈다. 초나라 昭王이 군사를 일으켜 공자를 맞이한 뒤에야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로는 불편했고, 자공은 듬직했으며, 안회는 애틋했다. 자로는 도덕적 경계의 표지, 자공은 정치적 실현의 표상, 안회는 관념적 이상의 기준이었다.

 

 

孔子遷於蔡三歲, 吳伐陳. 楚救陳, 軍於城父. 聞孔子在陳蔡之閑, 楚使人聘孔子. 孔子將往拜禮, 陳蔡大夫謀曰孔子賢者, 所刺譏皆中諸侯之疾. 今者久留陳蔡之閑, 諸大夫所設行皆非仲尼之意. 今楚, 大國也, 來聘孔子. 孔子用於楚, 則陳蔡用事大夫危矣.” 於是乃相與發徒役圍孔子於野. 不得行, 絕糧. 從者病, 莫能興. 孔子講誦弦歌不衰.

子路慍見曰君子亦有窮乎孔子曰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子貢色作. 孔子曰 ", 爾以予爲多學而識之者與?" 對曰 ". 非與?" 孔子曰 "非也. 予一以貫之."

孔子知弟子有慍心, 乃召子路而問曰, "詩雲 '匪兕匪虎 率彼曠野'. 吾道非邪? 吾何爲於此?" 子路曰 "意者吾未仁邪? 人之不我信也. 意者吾未知邪? 人之不我行也." 孔子曰 "有是乎! , 譬使仁者而必信, 安有伯夷·叔齊? 使知者而必行, 安有王子比幹?"

子路出, 子貢入見. 孔子曰 ", 詩雲 '匪兕匪虎, 率彼曠野'. 吾道非邪? 吾何爲於此?" 子貢曰 "夫子之道至大也, 故天下莫能容夫子. 夫子盍少貶焉?" 孔子曰 ", 良農能稼而不能爲穡, 良工能巧而不能爲順. 君子能脩其道, 綱而紀之, 統而理之, 而不能爲容. 今爾不脩爾道而求爲容. , 而志不遠矣!"

子貢出, 顔回入見. 孔子曰 ", 詩雲 '?匪虎, 率彼曠野'. 吾道非邪? 吾何爲於此?" 顔回曰 "夫子之道至大, 故天下莫能容. 雖然, 夫子推而行之, 不容何病, 不容然後見君子! 夫道之不脩也, 是吾醜也. 夫道旣已大脩而不用, 是有國者之醜. 不容何病, 不容然後見君子!" 孔子欣然而笑曰, "有是哉顔氏之子! 使爾多財, 吾爲爾宰."

於是使子貢至楚. 楚昭王興師迎孔子, 然後得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