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국가대항 운동 경기가 있으면 중계를 보며 광분하던 시절이 있었다. 자랑스러운 국가의 일원임을 확인했고, 열렬한 애국심의 충만에 스스로 감격하기도 했다. 그것이 국가의 가짜 이미지이고, 내부의 여러 모순과 부패를 은폐하는 장막으로 악용되며, 사회의 체질 또는 구성원의 행복한 삶과 무관하거나 악화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그 모든 것들이 시시해졌고, 절망이 되기도 한다. 방송사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쳐들여 요란을 떤 리우 올림픽이 막바지다.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겐 박수를 보내지만, 메달 수자에 목매는 언론의 태도는 봐줄 수가 없다.
무심결에 중계나 관련 뉴스를 보는데, 흥미로운 현상이 하나 포착되었다. 금메달을 딴 북한 선수들은 인터뷰하면서 예외 없이 '경애하는 장군님'을 찬양했고, 한국 선수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제일성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연말 시상식 연에인 수상소감의 단골 멘트이다.) 장군님과 하나님, 하나님과 장군님. 다르면서 같다. 부도덕하고 무능한 통치자를 지칭하는 장군님과 전능하고 유일한 창조자인 하나님이 어떻게 같은가? 양태야 물론 다르다. 하지만 둘 다 초월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같고, 자발적 경배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같다. 하나님에 대한 경배야 당연하고 자발적인 것이지만, 장군님에 대한 그것은 강압적으로 훈련된 것이니 다르다,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의식의 모든 고유성과 자발성은 외재성과 강제성에 의해 형성된 것이니, 경배의 본질이야 다를 게 없다. 자발성은 타율성의 결과이거나 강제성의 소거 현상인 셈이다. 그것은 적극적 종속의 합리화이자 비겁한 순응의 위장이 아닌가!
초월적 절대자에 대한 순응과 경배는 종교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정치 체제로 구현되기도 한다. 21세기 북쪽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권력 세습, 남쪽에서 보여주는 박정희 숭배와 박근혜에 대한 맹목적 지지, 이것들은 정도와 형태는 다르지만 뿌리는 하나이다. 그것은 이미지를 밀어내고 사유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고,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초월적인 어떤 존재라고 믿는 노예성의 표현이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이 아직 미숙하다는 증거이고, 과학 정신이 뿌리내리지 않았다는 표징이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아직도 많은 용기와 모험이 필요하다는 계시이다.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고, 승패를 떠나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드러난 결과의 원인을 자기자신에게서 찾으며 즐거워하는 시절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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