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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 풍자와 해탈이 아닌 (11.13)

검하객 2016. 12. 23. 13:50

  김수영의 <누이여 장하고나>를 이렇게 간추릴 수 있다. 


  누이여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나는 마주하지 못하는 실종된 동생을, 너는 매일 사진으로 보고 있구나.

  누이여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사람의 죽음이란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우스운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동생에게 절을 했다. 죽음 여부와 상관없이, 알 수 없는 것은, 未知는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니까.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누이야, 너는 장하다. 너는 그 미지를 일상에서 늘 정면으로 늘 바라보고 있으니까.


  나는 누이를 설득한다.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라고. 풍자는 대상을 두되 거리를 두고 다른 것을 말하기며, 해탈은 대상을 버려두거나 초월한다. 나는 '동생의 실종'과 거리를 두고 싶거나 그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생각해보면, 사람의 죽음이란 게 뭐 대단한 것이냐? 우스운 현상 아니냐? 그러니 너도 다른 것을 보거나 벗어나라. 나는 동생에게 절을 했다. 죽음 여부와 상관없이 未知는 부복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엎드려 절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정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생은, 현실을 응시한다. 그것도 매일 정면으로. 그 자체로 마주하는 것이다.그는 나처럼 물러나거나 외면하거나 초월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장한 것이다. 풍자와 해탈은 쉽다, 정말 어려운 것은 현실의 응시이다. 그러니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풍자와 해탈이 아닌, 응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