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다가 저녁 먹고 올라가란 어머니 제안을 못 들은 척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 동생네 가족은 먼저 돌아갔다. 어머니가 혼자 남겨진 것이다. 집에 돌아온 지 1시간쯤 지났을까 딸아이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는다. "어디 가게?" "응, 집에 가려고." 학교 앞 자취방에 간다는 것이다. 말없이 두어 가지 음식을 싸주고 말았다. 1시간이 더 지나자 작은 녀석이 외출복 차림으로 방에서 기어나온다. 친구 만나러 간단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늦어?" 한마디 뿐이었다. 나도 혼자 남겨졌다.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것을 사랑한다. 예술가가 자기 작품을,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건 자기애의 일종이다. 하지만 그 반대 방향의 애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작품이 자기를 만든 예술가를 사랑하지 않듯, 자식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다. 부모의 도움이 필요할 뿐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저런 당위와 윤리를 내세워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건 대개, 반복과 강요와 훈육과 상처로 인해 만들어진 후천적인 火印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쌓았어도, 그건 결국 한 점과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나는 무의미의 해저로 가라앉으면서, 슬픈 진실을 담은 명제 하나를 추가한다.
"연구자의 운명은 잊히는 것이고, 부모가 남겨지는 것은 필연이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처럼 우리 모두는 곧 소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