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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鋪의 비밀

검하객 2017. 7. 10. 16:25

 

연행로상, 하북성 당산시 풍윤구 서북쪽 7km 지점에는 高麗鋪村이란 지명이 남아있다. 풍윤에서 이 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還鄕河라는 물줄기를 건너야 한다. 기록상 고려포란 지명은 1539년에 처음 나타난다. 마을의 원래 이름은 謊粮坨였으며,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군을 속이기 위해 가짜로 곡식 무더기를 만든 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여러 기록은, 이 마을이 논농사 등 조선의 문화를 유지하였다고 전한다. 환향하라는 명칭에는, 당태종이 이 물을 건너 귀향했기에 유래했다는 설, 송나라 휘종이 북쪽으로 끌려가면서 한 탄식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한다.

 

王得成, 中朝, 中韓交往的重要驛站 - 高麗鋪, 河北學刊, 1995.

唐山市 豊潤區 豊潤鎭

 

원래 이름은 黃草坨, 謊粮坨. “相傳唐太宗設, 以誑高麗.” (풍윤현지, 고적) 유구한 양국 역사 교류의 흔적이다. 고려인이 여기 정착한 세 가지 이유, 전략적 요충지, 교류의 통로, 좋은 자연조건. (고로의 전언) 당대에 구역을 정해주고 고려인들을 정착시킴, 이후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마을 번성. 마을 이름의 기원은, 당대설, 송대설, 원대설. 원나라 때 急遞鋪 설치와 관련. 嘉靖 34(1555) 세원 高麗堡碑 발견, 명대에 명칭 변경 사실. 농업, 수공업, 경공업 기술 발전, 冀東의 제지술과 織布術은 고려의 영향을 받았다. 1천여 년의 역사, 갑오전쟁 뒤 일본의 강점으로 고려포 또한 쇠퇴.

 

黃普基, 心存卽爲鄕” : 淸代朝鮮使者對高麗鋪歷史的構建, 사회과학, 2013년 제 2.

 

고려포의 출현, 발전, 쇠락의 과정은 환향하의 지세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기록상 고려포 최초의 출현 시기는 1539년이다. 1537년의 연행기록에 고려포 명칭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建村 시기는 153710~153910월 사이일 것이다. 1537년 여름 환향하 대범람, 이후 대대적인 복구사업의 과정에서 새 마을이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마을의 쇠퇴는 환향하 물줄기의 이동과 관련 있을 것이다. 송 휘종의 피랍과 관련된 사연이 朱彛尊日下舊聞考에 수록되었고, 이는 다시 조선 사신들에게 전해졌다. 청 건국 이후, 송 휘종의 사연은 쉽게 조선 사신들에게 전염. 고려포는 이름뿐인 존재로, 동질성에 입각한 고려포 인식은 사실 허구의 역사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물리적인 자연조건의 변화와 관련지은 해석, 매우 흥미롭고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을 남긴다. 高麗란 이름을 취했을까? [水田] 등 일별에도 완연한 조선 문화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004년까지 연로에 있었던 일종의 기념관, 高麗堡 표지석, 6세기 중엽 세 성씨가 이곳에 살기 시작했고, 원래 이름은 황량타였으며, 무역 중심지로 청조말년까지 존속했다는 설명. 1466년 사신으로 북경에 갔다가 귀로에 통주에서 병사한 李文炯의 무덤이 이곳에 있었다는 설명. 2005년 다시 방문했을 때, 기념관은 사라졌다. 관련 유물들은 당산시 박물관으로 옮겨감. 이문형의 무덤이 이곳에 실제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고, 있었다고 해도 그 때문에 마을 이름이 고려가 되었을 가능성은 희박.

정황상 가장 합리적인 것은 황량타설화에서 유래했을 가능성. 이 길은 645년 동정시 당나라 군대의 이동경로였거나 그로부터 가까웠고, 사실과 상관없이 북경 동쪽 지역에는 고구려 관련 당태종 설화가 널리 전승되었으며, 이는 뒷시대까지 지명의 형태로 남은 경우가 많다. [이승수, 요동지역 고구려 관련 설화의 문헌 및 현장 조사 연구, 고구려의 등장과 그 주변, 동북아역사재단, 2009] 하지만 이 또한, 여러 기록에 나타나는 바, 물어볼 것도 없이 우리 문화와 같다는 증언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김창업, 老稼齋集 5, 燕行塤箎錄, 和伯氏高麗堡作. “草屋柴籬烟火踈, 門前稻畒水平渠. 村名不必煩相問, 景色依然是我居.” 



풍윤성의 동서를 가로질렀던 길은 현재 榮寧道가 되어 있다. 현지 고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豊潤賓館 있는 곳이 文廟, 그 길 건너 서북쪽 대각선 방향에 있는 공원이 관제묘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조설근 조상의 세거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남쪽 동서 방향 대로에 조설근동도와 조설근서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板橋村 지명은 그대로 남아있고, 鐵城鋪와 銀城鋪 두 지명으로 기록된 곳은 후자로 남아있다. 다만 이곳을 지나 풍윤성으로 진입하는 옛길은 지도로 확인하기 어렵다. 현지에서도 확인하는 것을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