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여백의 메모 (언어의 혈관)

검하객 2017. 7. 30. 18:02

 

  안타깝지만, 내 안에서 언어는 수혈을 통해서만 흐르기 시작한다. 내 몸은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비가 쏟아져야 흐르는 乾川처럼. (언어의 혈관)

 

  속도와 밀도를 이기지 못하고 낙오되는, 허무의 늪에 빠지고, 무의미의 덫에 걸리고, 삼국지연의는 좀처럼 읽히지 않는 나날, 1953년에 나온 <로마의 휴일>에서 잠깐 겨우 내게 맞는 속도와 밀도를 찾고, 조르조 아감벤의 "행간" (윤병언 옮김, 원제는 Stanze, 자음과 모음, 2015)을 펼쳤다. "우리는 왜 비현실적인 것에 주목해야 하는가", 표지 위에 적힌 구절이 왠지 나를 잡아 끈다.

 

  장맛비가 쏟아진 날, 궤도를 벗어나듯이 집을 뛰쳐나와 카페 씨밀레에 왔다. 하지만 여기 또한 궤도의 안, 부처님 손바닥 위 손오공처럼, 우린 끝내 이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제 몸 안에 견딘 세월 만큼의 동그라미를 그리는 나무처럼, 우린 자기 몸 둘레에 나이테를 만들 뿐이다.

 

  침묵의 비평?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가? 늦가을 북방 초원에 펼쳐진 누른 풀처럼, 어떤 언어도 제 몸의 물기를 잃었을 때, 낙타는 한 번 울까 말까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어차피 다음은 사막이라는 직감, 한 번 목 놓아 운들, 이 운명이 달라지는 것도 아닐진대, 하여 낙타는 침묵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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