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늦가을 금요일 오후, 신륵사 조사당 앞에서

검하객 2017. 10. 28. 01:12

 

   유학생 답사 일정이 일찍 끝났다. 버스를 보내고 혼자 남은 시각은 오후 1시 30분. 먼저 택시를 불러 아버지 산소에 갔다. 父子 인연으로 32년을 이 세상에서 살았다. (둘째는 28년, 막내는 고작 23년) 돌이켜보니 짧은 세월이다. 새삼 슬프다. 아버지도 하루가 멀다 술을 마셨고, 나도 종종 술을 찾았건만, 한 번도 술상을 앞에 놓고 마주 않아본 적이 없다. 앞으로 기회가 많을 터이니 서두르지 않은 것인데, 결국은 그 상태로 이승의 인연은 마감됐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병원에서 내 뒷목을 쓰다듬던 손길이 따스했지.

 

  마침 오곡나루축제 시작 날인지라, 신륵사 들어가는 길은 모두 떠들석거렸다. 가장 천천히 걸어서 경내로 들어갔다. 江月軒에 한참을 앉아 쉬었고, 꼬마 3층석탑을 매만졌다. 전탑과 장경각 사이 경계석 위에, 조사당 앞 나무 난간 위에, 나오다가 기념품 가게 앞 정자에 시름을 잊고 앉아 쉬었다. 은행나무 잎이 그야말로 눈부셨다. 사진을 몇 장 찍었고, 카톡방에 들어가 몇몇 벗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꺼내 속표지 여백에 이렇게 적었다. "我立秋陽下, 君臥三途亭." 나는 가을 볕 아래 서 있거늘, 자넨 삼도천 정자에 누워있겠지. 따사로운 가을 볕 속에 익어가는 눈부신 풍경을 보내주고 싶건만.

 

  고구려 적 이곳의 지명은 骨乃斤이었다. 신륵사 맞은편 영월루 아래에서 黃馬와 驪馬가 솟구쳐 나왔다고 한다. 하여 이곳의 바위를 馬巖이라고 불렀다. 물 속에서 나온 말은 용을 뜻한다. 누렇고 검은 용(마)/(용)마는 홍수를 의미한다. 여름 장마철이면 남한강은 넘치곤 했다. 어릴 적 할머니 집 마당까지 들어와 찰랑거리던, 앞 신작로 너머 들까지 가득한 물에 물뱀이 헤엄쳐가던 장면이 기억난다. (천송리 60번지, 지금의 천송동) 印塘大師(나옹화상, 남이 장군)가 굴레로 말의 목에 씌웠다. (인당은 누군지 알 수 없고, 나옹과 남이는 뒤에 덧붙여진 것이다.) 하여 절 이름이 '神勒'이 되었다. 고대 지명 '골내'와 '勒'은 서로 통한다. 선후 관계는 명확치 않으나, 신륵사는 불교의 힘으로 남한강의 범람을 다스리려는 의도와 상관이 있겠다. 물론 '骨內'라는 지명이 제일 처음이고, 여기서 이를 표기하기 위해 '勒' 자가 동원대고, 승려의 사연은 뒤에 부회된 것일 수도 있다.

 

  馬巖까지 찾아보고 여주역까지, 대략 3km는 걸어갔다. 택시를 타고 싶었지만 잡는 게 어려운 일인지라. 오랜만에 걷다가 앉아 쉬고 쉬다가 다시 걷는, 느리게 보낸 한나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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