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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영시암(永矢菴)

검하객 2019. 8. 25. 02:15

 

  만해마을에 간 김에 영시암을 찾았다. 백담 계곡은 비현실감이 들 정도로 맑았다. 백담사에서 영시암까지는 4km, 아무리 빨리 걸어도 1시간은 걸린다. 20년 전에는 암자 하나만 덩그라니 있었는데,(기억은 가물가물) 그 새 건물이 7,8채나 되는 규모로 성장(?)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는 53세(1705년)부터 62세(1714년)까지의 주 거처는 설악산이었다. 1707년 오세암 아래 20리쯤 되는 곳에 碧雲精舍를 지었다. 영시암과 오세암 사이의 거리가 2.8km이니, 20리 는 산길이기 때문에 생긴 심리적 거리이다. 벽운정사 와 영시암은 같은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벽운정사는 이듬해 화재로 소실되었다. 삼연은 일시 白蓮菴과 深源寺에 머물렀다. 이듬해(1709) 9월 영시암이 지어졌다. 深源寺 남쪽에 朝元峰 아래라고 했는데, 심원사는 찾을 수 없다.  삼연은 이로부터 1714년 10월 최춘금이 호환을 당해 부득이 하산할 때까지 약 5년 동안을 여기에 머물렀다. (물로 자주 산 밖 나들이를 했음) 근래 영시암을 새로 지은 사람은 도윤이라는 승려였는데 타계하고 없다. 지금의 백담사의 부속 암자로 변신해 있다. 삼연의 빛나는 설악산 시기의 여러 장소를 찾아보지 못했다. 葛驛이 있던 곳도 백담사 아래 용대리라는 설명이 표지판에 있는데, 이건 확인되지 않는다. 매월당에 삼연에 만해까지, 그러고 보니 나와 이곳은 꽤 인연이 많다. 새삼 설렌다. 

 

  

 

영시암 전경(왼쪽), 1708년에 지는 시. 이 시의 첫 두 구 "髮白心猶活, 形枯道益肥."를 좋아한다.    

 

  영시암의 정면의 주련은 삼연이 1714년에 지은 7언 율시 <영시암 2>이고, 오른쪽 측면은 1713년 신년 첫날을 위해 하루 전 날 지은 <영시암춘첩> 3수 중 첫 번째 것이다. 뜻? 글쎄 ~  

 

  雲守虗樓鹿守園

  檢看舂井宛然存

  牛於耕日勤生犢

  蜂在花時閙出孫

  可忖山奴治事密

  亦知隣寺護緣敦

  西游得喪都休說

  且據殘冬受飽溫

 

 

  白玉靑絲隔漢陽

  隣僧菜把亦盈筐

  山家風味來無盡

  纔茁當歸蕨又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