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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검하객 2020. 1. 22. 10:46


  늦은 점심을 먹고 동문회관에서 병원으로 올라가는 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대개는 차를 타고 지나는 길이다. 일부러 느리게 걷기로 했다. 느리게 걷다 보니 평소 보이지 않던 사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잎이 진 키 작은 단풍나무 곳곳에 폐가들이 눈에 띈다. 지난 늦은 봄 잎이 무성할 때 붉은머리오목눈이 같은 작은 새들이 지어놓은 둥지일 것이다. 새들은 모두 떠나고 이젠 모두 비어있는데, 지난 늦가을 잎이 다 지며 그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여기에 둥지를 짓고 알을 낳고 품던 어미새의 사랑과 본능과 불안, 영문도 모르고 태어나 그저 본능에 따라 지저귀었을 새끼새들의 주림과 호기심과 희망, 그리고 둥지를 떠나면서 생긴 이별과 방황, 천적과의 만남 등은 다 어디 갔는가? 지금은 빈 집만 남아있다. 기형도는 젊은 시절의 상실, 번민, 방황, 공포, 열망, 무지, 주저가 유폐된 빈 집을 그렸다. 청년기의 대단한(?) 상실감을 가공하지 않은 상태로 토설한 이 시는, 이미 나이든 내게 한없이 풋풋하고 싱싱한 느낌을 준다. 나는 무언지 모를 힘에 이끌려 나무 밑에서 한참 동안 빈 둥지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에 내가 잃어버린 어떤 것들이 들어있는 것일까!



     


    빈 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