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은 16,7세 소년 시절부터 포은을 흠모했고, 청년기부터는 행보를 같이 했다. 성균관에서 학문울 쌓았고, 1375(34세)년에는 포은에 동조하여 원사 거부를 주장하다가 함께 유배를 갔다. 1377년 포은이 해배될 때 같이 풀려났다. 1380년부터 3년 가량 가량 김포 전장에 은거했다. 모색과 사유의 시기였다. 1383년(42세)과 이듬해 함흥으로 이성계를 찾아갔고, 결심을 굳혔다. 1383년 함흥 행에는 포은도 시를 지어주며 한껏 격려했다. 1384년에는 서장관으로 포은과 함께 남경에 다녀왔다. 귀로에 발해 재 위에서 두 사람이 지은 시는 그날의 광경을 떠오르게 한다. 이들의 행보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폐가입진 명분의 공양왕 추대에 이르기까지 다르지 않았다. 갈라지는 건 그 이후 1,2년, 고려의 운명을 선택하는 시기이다.
삼봉은 신분에 약점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약점은 삼봉에게 열등감이 되었고,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했고, 평정을 유지하는 힘을 길러주었으며, 혁명적인 포부의 동력이 되었다. 그는 차분하고 침착하며 냉정했다. 포은처럼 자기 감성에 충실하지 못했다. 나주에서는 유배지를 "소재동"(재액을 없애는 곳)으로 명명했고, 겸손하게 (가상의) 농부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도깨비들(온갖 번민과 고뇌)을 벗으로 삼아 어울렸다. 김포 은거 시기에는 병법을 익히며 천하의 판세를 읽었다. 그에게 기존의 세계는 그다지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세계를 뒤집어지고 새 판이 짜여지기를 열망했으며, 마침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결심했고 실행에 나섰는데, 그 과정이 신속하고 과감했다. 그는 유학은 자기 평생의 계책이 아니라 했고, 작은 득실을 셈하며 인생을 허비하고 말라고 자신을 다잡았다. 그의 생각은 보통 유자들의 한계선을 넘어 한참 먼 곳까지 이르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