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꿈을 꾸고, TV 화면 안에 화면이 있다. 이야기 안에 다시 이야기가 있으며, 시 가운데서 다른 노래소리가 들린다. 잠들기 전 잠깐 TV를 켰다가, 어떤 장면에선지 문득, '이미 너무 많은 걸 가졌는데 뭘 또 바라 짜증을 내고 힘들어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빨간 소파의 등받이 면을 향해 모로 누워 잠을 청하는데, 백석의 시가 떠올랐다. 빨간 등받이에는 한 줄 한 줄 나타났다가 차례로 사라지는 영상의 자막처럼, <흰 바람벽이 있어>(1941년)의 글자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떠오르더니 머물지 않고 하나 하나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나비들이 다 날아가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이 나비들은 백석이 長春 東三馬路에서 여러 날 애벌레들을 모아 품은 뒤 글자의 잎에 놓아둔 것들이다. 괴물처럼 내 목을 조르던 虛幻의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 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면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뿐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아자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끊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먹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 과 '도연명' 과
'라이나 마리아 릴케' 가
그리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