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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속의 노래, <흰 바람벽이 있어>

검하객 2020. 11. 12. 10:39

  꿈속에서 꿈을 꾸고, TV 화면 안에 화면이 있다. 이야기 안에 다시 이야기가 있으며, 시 가운데서 다른 노래소리가 들린다. 잠들기 전 잠깐 TV를 켰다가, 어떤 장면에선지 문득, '이미 너무 많은 걸 가졌는데 뭘 또 바라 짜증을 내고 힘들어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빨간 소파의 등받이 면을 향해 모로 누워 잠을 청하는데, 백석의 시가 떠올랐다. 빨간 등받이에는 한 줄 한 줄 나타났다가 차례로 사라지는 영상의 자막처럼, <흰 바람벽이 있어>(1941년)의 글자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떠오르더니 머물지 않고  하나 하나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나비들이 다 날아가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이 나비들은 백석이 長春 東三馬路에서 여러 날 애벌레들을 모아 품은 뒤 글자의 잎에 놓아둔 것들이다. 괴물처럼 내 목을 조르던 虛幻의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 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면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뿐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아자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끊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먹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 과 '도연명' 과

  '라이나 마리아 릴케' 가

  그리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