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우드의 고아학교 생활을 뒤로 한 18살의 제인 에어는 손필드에 있는 대저택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이 집에서 아델이라는 소녀를 가르친다. 아직 이 집 주인을 보지 못했다. 석 달쯤 지난 1월 어느 날, 제인 에어는 헤이 마을로 페어팩스 부인의 편지를 대신 부치러 간다. 헤이로 가는 이 길의 분위기를 샬럿은 매우 공들여 묘사한다. 고요한 가운데 달이 뜨고 푸른 연기가 오르는데, 시냇물 소리 사이로 먼 데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개가 먼저 나타나고, 그 뒤로 말을 탄 사람이 다가오다가 지나간다. 그냥 지나가다보다 했는데, 제인 에어를 뒤돌아보게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말이 넘어진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이 중요한 만남을 허투루 처리할 수는 없는 법, 하여 샬럿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적막감을, 또 그 운명을 달과 연기와 시냇물소리와 쿵쿵 소리와 개와 말을 앞장세워 등장시킨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운명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했다가 다시 꺾어 돌아오게 했다. 曲折法이다. 아름다운 장면이다.
1월의 어느 날 --- 어팩스 부인은 방금 전에 편지를 한 통 써서 그것을 부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보닛을 쓰고 망토를 걸친 다음 헤이에 가서 편지를 부치고 오겠다고 자청했다. ---
땅은 얼어서 딱딱했고, 공기는 잔잔했으며 길은 고적했다. 나는 몸에서 열이 날 때까지 빨리 걷다가 천천히 걸으면서 그 시간과 상황이 내게 마련해 준 여러 가지 즐거움을 즐기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였다. 종루 밑을 지나갈 때 교회 종이 울렸다. 그 시각의 매력은 점점 다가오는 어둑어둑함과 낮게 기울어져서 흐릿하게 빛나는 햇살에 있었다. 나느 손필드에서 1마일 떨어진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여름에는 들장미로, 가을에는 견과와 블랙베리로 유명한 그곳에는 지금도 들장미와 산사나무의 열매 속에 몇 개의 산홋빛 보물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겨울에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은 완전한 고독과, 잎이 다 떨어진 뒤의 고요였다. 산들바람이 불어도 여기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낼 호랑가시나무 가지 하나도, 상록수 하나도 없었다. 완전히 잎이 다 떨어진 산사나무와 담갈색 관목들은 길 한가운데에 깔린 하얗게 닳은 돌멩이들만큼 조용했다. 멀리 양옆에는 풀을 뜯는 소 떼도 없이 들판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산울타리에서 이따금씩 움직이는 작은 갈색 새들은 떨어지는 걸 잊어버린 홑겹의 황갈색 나뭇잎처럼 보였다.
이 길은 헤이까지 계속 오르막길로 이어졌다. 중간에 이르렀을 때 나는 들판으로 이어지는 울타리 계단에 앉았다. 얼어붙을 것처럼 매섭게 추운 날씨였지만 망토로 몸을 감싸고 토시 안에 손을 집어넣자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자갈길 위에 덮여 있는 얇은 살얼음을 통해 지금은 얼어붙은 작은 시냇물이 며칠 전 갑작스러운 해빙으로 넘친 것을 알 수 있었다. 앉아 있는 곳에서 손필드가 내려다보였다. 흉벽이 있는 회색빛의 저택이 아래쪽 골짜기에서 가장 잘 보였다. 손필드의 숲과 검은 당까마귀 무리가 서식하는 숲이 서쪽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나는 나무들 사이로 해가 져서 나무들 뒤로 해가 붉고 선명하게 가라앉을 때까지 머뭇거리다가 동쪽을 향해 다시 길을 갔다.
위쪽 오르막길 위로 막 달이 뜨고 있었다. 구름처럼 어슴푸레했지만 순간적으로 밝아지면서 달이 헤이를 굽어보았다. 나무들 사이로 반쯤 가려진 헤이는 몇 개의 굴뚝에서 푸른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직 1마일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완전한 정적 속에서는 삶의 희미한 중얼거림도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도 들렸다. 그 냇물이 어떤 골짜기, 어떤 구석에 흐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헤이 너머에는 많은 언덕이 있었고 틀림없이 언덕 고갯길을 지나는 시내가 많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의 고요함 때문에 가장 가까운 곳을 흐르는 시냇물의 졸졸거림과 가장 먼 시냇물의 속삭이는 소리가 똑같이 들려왔다.
아주 멀리서, 아주 선명하게 귀에 거슬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이 멋진 잔물결 소리와 속삭임 소리에 갑자기 끼어들었다. 분명하게 들리는 쿵 쿵 소리, 금속성의 그 말발굽 소리에 굽이쳐 흐르는 부드러운 물소리가 지워졌다. 그것은 그림에서 보자면, 전경에 어둡고 강하게 그려진 단단한 바윗덩어리나 커다란 참나무의 거친 나무줄기가 하늘 높이 아늑히 보이는 쪽빛 언덕과 햇살 가득한 지평선, 여러 가지 색이 섞여 있는 구름을 가리키는 것과 같았다.
시끄러운 소리가 자갈길 위에서 들려왔다. 말이 한 마리 다가오고 있었다. 오솔길이 구부러져 있어서 아직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울타리 계단에서 막 일어서서 가려던 참이었지만 길이 좁았기 때문에 말이 먼저 지나가도록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어렸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서는 밝고 어두운 온갖 종류의 환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육아실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에 대한 기억이 다른 시시한 생각들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기억이 되살아났을 때 나이가 조금 더 들어 성숙해지고 있던 나는, 거기에 어린 시절에는 부여할 수 없었던 활력과 생생함을 보탰다. 말이 다가올 때 그것이 황혼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이트래시’라 불리는 영국 북부 지방의 귀신이 말이나 노새, 혹은 큰 개의 형상을 하고 한적한 길에 출몰하거나 늦은 길을 가고 있는 여행자들에게 나타난다는 베시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매우 가까웠지만 아직 보이지는 않았다. 쿵쿵거리는 소리 외에도 산울타리 밑에서 뭔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개암나무 가지 옆으로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미끄러지듯 바싹 다가오고 있었다. 개는 검고 하얀 색깔 때문에 나무들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정확하게 베시가 이야기해 준 가이트래시의 한 형상인, 긴 털에 머리가 거대한 사자 같은 괴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조용히 내 곁을 지나갔다. 어렴풋한 내 예상과 달리 그것은 멈춰 서서 개보다 더 똑똑해 보이는 이상한 눈으로 내 얼구을 올려다보지도 않았다. 그 뒤에 키가 큰 말이 따라왔고 말 위에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사람인 그 남자가 즉시 마법을 깨버렸다. 어떤 것도 가이트래시를 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이트래시는 항상 혼자였다. 짐승들의 말 못하는 시체에 사는 악귀들은 흔한 인간의 형상 속에서 사는 것을 탐내는 법이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이것은 결코 가이트래시가 아니었다. 단지 길소이 지름길로 밀코트에 가고 있는 중일 뿐이었다. 그는 지나갔고 나는 길을 계속 갔다. 몇 발자국을 걷던 나는 몸을 돌렸다. --- (제인 에어 1, 이미선 옮김, 열린책들, 2011177~1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