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는 1945년 9월 이후 극우파가 극좌파를 호명할 때 간혹 사용되다가, 1948년부터 적대적인 의미가 담긴 채 자주 사용되었다. (* 1948년 대표 유행어는 ‘무역(밀매)’과 ‘빨갱이’라는 연구 결과)
이승만 중심의 정파는 ① 지지 기반이 허약했고, ② ‘친일 전력’이라는 약점을 지녔다. 이들에게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의 제정은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들은 ‘빨갱이 담론’을 만들어, 자신들의 과거를 세탁하려고 했으며 ‘반민(족)정국’을 ‘반공(산)정국’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반민족처단법 제정자, 단선 반대자 등을 모두 빨갱이나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는데, 그 시도는 매우 결사적이면서도 극렬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8년 11월 9일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빨갱이 담론이 위력을 발휘하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제주 4·3과 여순사건(1948년 10월)이었다. 두 사건을 계기로 한국 군대는 일본군 출신들이 장악하게 되었고, ‘빨갱이’의 극악한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문인과 종교인의 역할) 이후 빨갱이는 죽여 절멸시켜야 하는 ‘악 그 자체’가 되었다. * 이런 구도는 이후 세계적인 냉전 분위기 속에서 한국전쟁을 겪으며, 또 군사독재가 이어지며 고착, 강화되었으며, 여전히 한국 사회에 강하게 남아있다.
강성현, 「‘아카(アカ)’와 ‘빨갱이’의 탄생 - ‘적(赤-敵) 만들기’와 ‘비국민’의 계보학」 (2013)
사회와 역사 100, 한국사회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