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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

검하객 2022. 1. 13. 23:48

 

  오랜만에 신문을 읽었다. 경향신문을 구독한다. 구독하지만 읽지 않는 날이 많다. 안 읽어도 된다. 구독은 이 신문에 대한 성원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100부쯤 정기구독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배달하게 하고 싶다. 얘기가 샜다. 오랜만에 신문을 읽었다. 중요해서 읽는 게 아니다. 내가 읽음으로써 기사에 가치가 부가되는 것이다.

  김태일의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진보다>, 좋은 글이다. 아래 말에 동의한다. 

 

  "페미니즘은 이렇게 한 개인의 내면에서 갈등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도 수반하였다. 가부장적 권위주의 사회에서 억압받고 있는 여성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과정은 기존의 가치 질서를 바꾸는 운동이기 때문에 사회적 충돌은 불가피했다. 여성의 해방 과정은 힘든 투쟁을 통해 이루어진 것인지라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짧은 페미니즘 역사를 보면 어느 것 하나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페미니즘이란 궁극적으로 모두를 위한 진보라는 얘기다. 그렇다. 여성과 남성이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남성을 배제하자는 것도 아니다.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가치가 아니다. 여성이 살기 좋은 사회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좋은 사회다. 성차별이 없어지면 다른 모든 사회적 차별도 없어진다. 장애인, 노인, 어린이, 다문화가족, 왼손잡이도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출발이다."

 

  조찬제의 <저은 문 앞까지 왔건만>도 읽었다.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 현상에 대한 글이다. 특히 내전 불사를 외치는 공화당 지지자들의 행보를 대하는 시선에는 우려가 담겨 있다. 이 사람은 미국 얘기를 하고 있지만, 기실 마음은 우리 현실에 있는 건 아닐까! 국내 굴지 기업의 경영자가 대놓고 '멸공'을 외치고 생각없는 대선주자나 그를 추종하는 국회의원들이 그걸 따라하는 우리의 상황은 사실 걱정이다. 역사는 다시 끔찍한 과오를 되풀이되는가, 필부의 마음은 한없이 무겁다. 

 

  김태권의 <'생소함'에 대하여>는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1891~1976)의 당시로서는 뛰어난 성취들이, 눈부신 기술의 발전에 따라 평범해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 "상상이 기술을 낳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산업이 상상을 규정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글은 "앞으로도 창작자의 상상력은 창조성을 뽐낼 것이다. 기술 발전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 다니며 말이다."라는 구절로 끝난다. 나는 과학과 기술이 주는 편리의 혜택을 누리는 동시에, 과학과 기술의 제동과 절제 능력을 불신하는 러다이크로, 한 번도 기술의 문제를 정면으로 고민해본 적이 없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나의 딜레마를 톡 건드린다, 아프다!

 

  "할머니, 학교랑 핵겨는 어떻게 다른 말이야." (충청도 손주) "학교는 다니는 곳이고, 핵교는 댕기는 디여." (충청도 할머니) 이명재 시인이 펴낸 <속터지는 충청말 2>를 소개하는 기사 <사투리는 '소통' --- "우리 것이 좋은 것이쥬">는 재밌다. 그의 생각이 바로 내 생각이다.  

 

  이밖에도 <13층 원각사탑이 왜 120년 넘도록 10층으로  불리나>, <디지털 학습, 준비 안 된 2년의 교훈>, <당신이 야구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 <시간과의 대화>, <포도주를 위한 변명>도 읽었다. 오랜만에 골목을 산책하며 이웃들과 인사를 나눈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