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영, 「나는 사과한다」,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다산책방, 2016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는 말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그의 시 「서정시 쓰기」에서 다음과 같이 야만의 나치즘을 개탄했다.
나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세상에 널린 참혹함에 대한 침묵이므로
거의 죄악이라면 그 시대는 어떠한 시대인가
아우슈비츠는 홀로코스트의 상징인데, 지금으로부터 33년 전 내가 처음으로 제주4·3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 「순이 삼촌」을 쓸 때의 내 생각도 그와 비슷했다. 4·3사건을 말하지 않고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나는 나 자신에게 다짐했었다. 그 대학살 사건은 오랜 세월 동안 역대 독재정권들에 의해 발설 못하게 철저히 금압당해왔기 때문에 당시의 나로서는 그것이 서정도 웃음도 들어갈 수 없는 절대적 사건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보도연맹의 학살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그 사건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모가 왜 죽었는지, 그 사건이 무엇인지 자식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유신정권의 공포정치가 그렇게 만들었다. 얼마나 무서운 사회였던가.
그러나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렀다. 군사독재는 물러나고 그에 따라 그 사건도 금기의 음습한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4·3의 글쓰기도 조금은 너그러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모든 걸 엔터테인먼트와 쇼로 만들어버리는 이 경박한 시대에 해묵은 엄숙주의만을 고집하다간 비웃음을 당하기 십상이지 않겠는가. 그 참상을 진상에 가깝게 리얼하게 그리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그래야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자초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너무도 끔찍한 참상이어서 그것을 리얼하게 재현한 작품은 독자에게 공포를 일으키거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외면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공포는 연민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참혹함에서 한 발짝 물러난 작품, 즉 공포보다는 연민을 일으킬 수 있는 작품이 필요하다.
나는 몇 년 전 이태리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로베르토 베니니 감독, 1997)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은 바 있다. 그 영화는 홀로코스트의 절망과 공포를 경쾌한 유머로 꿰뚫으면서 밝은 미래에 대한 강한 확신을 보여준다. 비극 속에 잘 배치된 유머와 미래에 대한 전망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 제목은 멕시코에 망명해 있던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의 유언장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했다.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가 조만간 들이닥치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트로츠키는 어느 날 창 넘 아름다운 아내 나타샤를 바라보면서 유언장을 썼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마당에 있던 나타샤는 방금 창가로 다가와서, 공기가 더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하기 위해서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는 마당의 벽을 따라 자라고 있는 밝은 초록빛 풀들과 그 벽 위의 맑게 갠 푸른 하늘, 그리고 사방에 가득한 햇빛을 볼 수 있다. 인생은 아름답다. 우리 뒤에 올 세대들이 인생에서 죄악, 억압, 폭력을 말끔히 씻어내어, 인생을 한껏 즐겁게 누릴 수 있기를.
그 말이 맞다. 글 쓰는 자는 어떠한 비극,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독자에게 확신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각성이 생겼다. 이제는 비극에 서정과 웃음을 삽입하는 일을 꺼려서는 안 되겠다. 비극을 더 선명하게 부각하기 위해서라도, 혹은 비극을 넘어서는 어떤 전망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서정과 웃음을 작품 속에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등한히 하거나 무시했던 나무와 꽃에게, 달과 강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서정시에 대해서도 사과한다. 그리고 싸우는 동안 증오의 정서가 필요했고, 증오가 가득한 마음으로는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속이 느끼했는데, 이제 나는 그 사랑이란 두 글자에 대해서도, 그것을 노래한 사랑의 시에 대해서도 머리를 조아려 사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