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 입문서를 보니 자연 오랜 有無空色論이, 그에 대한 견해들이 떠오른다. 카를로 로벨리의 글을 읽다가 생각치 않게 서당과의 먼 기억이 되살아났다. 20여 년 전 나와 서당 사이에 강한 중력이 작동했고, 지금 나와 카를로 사이에 또한 인력이 작용하고 있으니, 서당과 카를로 사이에도 그런 힘이 있는 것인가! 20년 전 흔적을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보니 그 시절 대화가 풋풋하다. 허나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여물은 게 없고 풋풋함은 사라졌을 뿐이다. 틈나는대로 서당의 글 몇 조목을 다시 꺼내 음미해보기로 한다.
지나간 일을 잊기도 하고 잊지 못하기도 하지만 모두 번개가 번쩍이고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아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앞으로의 일은 순식간에 일어나니 예측할 수가 없다. 오직 현재만이 목전에서 응접하지만 저녁이면 아침을 잃고 오늘이면 어제를 잃으니 찰나의 사이가 곧 과거에 속하고 말아 잠시라도 가지고 놀 수가 없다. 그러니 과거는 실체가 아니요, 현재도 실체가 아니며, 미래 또한 실체가 아니다. 모두 실체가 아니라면 모두 허망한 것이다. 그 사이에 망령되어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니 이를 일러 ‘본디 幻이 아닌데 幻이 되고 마는 法. 非幻成幻’이라 한다. 事之過去者, 或忘或不忘, 電激雲逝, 俱無留迹. 事之未來者, 倏爾而起, 不可豫期. 唯現在者, 爲目前應接, 而夕已失朝, 今而失昨, 刹那之間, 便屬過去, 曾不可須臾把翫. 然則過去非實, 現在亦非實, 未來亦非實也. 旣皆非實, 則皆爲虛妄, 而乃於其間, 妄生取捨. 是之謂非幻成幻. (〈파조록〉 권 2, 제 42칙)
非幻成幻은 《능엄경》 권 6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自心取自心, 非幻成幻法, 不取, 無非幻. 非幻, 尙不生, 幻法, 云何位.” 계환(戒環)은 이렇게 주해하였다. “一切諸法, 唯心所現, 而於中取著, 妄成根結, 是自心取自心, 非幻成幻法也. 由妄取故, 有幻非幻, 若不妄取, 非幻亦無. 非幻尙無, 幻法何有. 幻法不立, 則根立頓淨, 圓通現前矣.”라 주해하였다.
같은 생각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과거는 꿈속의 몸이 되었고 過去曾爲夢裏身
미래엔 지금의 몸을 꿈꾸리 未來應夢現前人
꿈속서 혼이 삼세를 통하니 若敎魂夢通三世
참 아니라는 것 또한 참이라 道着非眞也是眞
이 시는 꿈에 얽힌 사연으로 제목을 삼았다. 6~7년 전 관동지방의 수령으로 갔다가 얼마 안 있어 돌아왔다. 이때 고을 사람들이 바닷가 정자에서 전별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자리가 파하여 사람들은 일어나고 말은 문밖에 매여 있는데, 기둥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니 서글픈 마음이 일었다. 이것이 꿈의 내용이다. 서당은 실제 1723년 간성에 부임했다가 1년 만에 돌아왔다. 돌아올 때 고을 사람들이 淸澗亭에서 송별하는데 그 광경이 꿈속의 경색과 흡사했다는 것이다. 서당은 이에 “인생의 離合 去來는 모두 앞서 정해진 것이다.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하고는 그 느낌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서당은 夢驗을 유난히 많이 말했고, 또 그 신빙성을 억지로 의심하지 않았다. 꿈을 헛것이나 우연으로 돌려버리지 않고 여기서 ‘현재의 삶이란 과거에 정해진 것’이라는 생각을 이끌어 냈다. 역시 불교의 인연설과 유사하다. 시에서도 현실은 참이고 꿈은 거짓이라는 현실 중심의 이분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불교식으로 설명하면 六識으로 파악되는 현상계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