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보면 곳곳에서 동백 낙화와 섞여 시가 밟히는, 길을 잃어야 비로소 길을 찾을 수 있는 곳, 통영에 오면 우리는 박경리 마을의 주민이 된다. 죽림고개를 넘으며 옛날 이 땅에 들어오는 외지 양반이 걸어놓았다는 갓을 찾는 것이며, 달리는 자동차들 속에서 봉제 영감과 성수를 태운 채 앞뒤로 걷는 나귀의 발굽 소리를 듣는 것이며, 봉룡처럼 나 어릴 때 집 나간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구신이 득시글한 명정골 폐가 마루에 오두마니 앉은 소년이 보이고, 연순을 태운 꽃상여가 장대고개를 넘어가는데, 활장같은 굽은 길을 살대같이 내가 간다는 소리가 처량히 들리는 것이다. 길들지 않은 낙타 같은 용숙이 되어 밤숲에서 한돌과 야생의 정사를 나눠도 보고, 그런 딸이 안스러워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며 아가 ~ 하고 부르는 한실댁도 되어보는 것이다. 선창 옥화 술집에서 대구어장 걱정을 하는 뱃사람이 되고, 새터 장에서 어물을 팔고 일어서며 손의 비린내를 맡아보는 아낙도 되어보는 것이다. 미륵산 용화사에 가서 불공도 드려보고, 이월 풍신제에 쓸 정화수를 뜨러 온 온 동문 밖 처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몰락하여 을씨년스런 간창골 김약국 집에 남은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그려보면서, 어긋나기만 하는 내 삶을 고요히 위로해보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어느새 마을 당산 나무의 전설에 귀를 기울이고, 계획에 없이 멀리 한산섬이 보이는 산양의 조촐한 무덤을 찾아 서성거리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