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마법에 빠진 믿음은 물신 숭배의 현대식 변형이다. 물신 숭배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물건에 초자연적인 힘을 실어주는 태도다. … 물신 숭배는 모든 대상에 거대한 전체를 투사함으로써 성립한다. (227) 물신 숭배(fetischimus)는 포르투갈어 페이치수(feitico, ‘거짓’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페이치수의 어원은 라틴어 파세레(facere)로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물신 숭배는 자신이 마든 대상을 자신이 만들지 않은 것처럼 꾸며 보이는 태도다. (228)
종교의 두 형식, ① 물신 숭배, ② 무한함을 바라보는 취향과 의미의 표현(슐라이어마허). (231)
과학적 세계관이 가진 물신 숭배 성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세계관이 종교와 경쟁을 벌이는 게 우연이 아니다. 과학적 세계관은 일종이 종교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형식의 종교는 모든 것을 조종하는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 무언가’는 하ᅟᅳᆫ님이나 힌두교의 신들, 모든 자연법칙을 도출해 내는 물리학의 우주 공식이다. 물신 숭배는 어떤 특정한 대상을 숭배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든 하나의 대상을 숭배하는 태도다. 도대체 왜 이 대상이 그토록 숭배할 가치가 있는지 하는 물음을 물신 숭배는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물신 숭배는 하나의 대상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 동일시하며, 이 대상으로 정체성의 표본을 만들어 내고 모든 사람이 이에 따르도록 강요한다. 섬겨지는 게 신인지 ‘빅뱅’인지는 부수적인 문제이다. 중요한 건 보편적 근원으로 꾸며진 것을 숭배하라고 강요하는 태도이다. (236,7)
많은 고전적인 구원론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실 전체와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고 해석하는 다채로운 세상이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환상이라는 장막 뒤에 가려진 진리를 알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정확히 이런 태도가 과학적 세계관의 특징이기도 하다. 색깔, 모든 볼 수 있고 만지며 들을 수 있는 대상은 원래 환상일 뿐이며, 그 배후에 숨은 참된 본질을 알아내야만 한다고 과학적 세계관은 강변한다. 오직 사제 혹은 과학 전문가만이 이 본질과 접할 통로를 지닌다. 옛날에 전문가는 라틴어를 말했다면, 오늘날 그가 쓰는 언어는 수학이다. (237)
마르쿠스 가브리엘, 김희상 옮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열린책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