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준은 곡절 끝에 자기 운명, 그 해 여름 W시를 찾아갔지만, 간첩으로 몰려 법정에 선다.
소년단 지도원 선생은 검찰이 되어 독고준을 기소하고 심리한다.
그 여름 등교를 말리던 석왕사역 역장은 독고준을 변호한다.
역장은 독고준의 노트 내용을 공개하여, 그가 미친 사람임을 입증한다.
이 시로 독고준은 비정상의 사람으로 판명되어 석방된다.
역장이 공개한 노트 내용은 시 4수이다. (제목은 각각 다알리아, 바람, 손님, 바람과 비)
이 시들은 독고준이 정신병 환자라는 증거다.
다알리아
불타는 다알리아 한 송이
불수레같이
핑그르 핑그르르
돌고 돌라
큰물진 뒤 끝에
주름과 주름 사이
마디와 마디 사이
구석과 구석이
문둥이 부스럼처럼
일그러졌다
다알리아는
화려한 가슴에 피어난
불의 꽃
가냘픈 정맥이 돋아난
창백한 손바닥 위에서
숨지는 것은 오히려 서러운
목숨의 부스럼을
아름다이 잡아먹어야
사는
빛나는 요부
폭우 짓내리는
캄캄 칠야에
죽지 않는 귀신이
땅에 붙어서 낳은
우주의 불구멍이여
싱싱한 고기몸 같은
포플러 잎새 위에
칼날 이슬이 번쩍하는
의젓한 아침이 열리기 위하여
햇바퀴만한
다알리아 한 송이
날리는 머리발처럼
휭휭 돌아야 한다
다알리아는 붉고, 뜨겁고, 끝없이 도는 존재이다. 얽매이지 않고 유혹하며 파괴하는 妖婦이고, 어둠과 불사신과 대지의 딸이다. 우주의 불이 나오는 곳이다. 맥없고 안온한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다알리아는 큰물이 진 뒤 일그러져있다. 의젓한 아침이 열리기 위해서는 이 다알리아가 다시 돌아야 한다.
바람
바람은 참 아스ᄅᆞ한 것이다
옛날에 그것은 영차
끝없는 방랑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바람은 설움을 지니고 다니기를 즐기지 않아
온 하늘에 알알이 흩어놓았다
바람은 동무가 없어 혼자서 숨기 내기를 해야 한다
우리는 바람의 바람구멍이다
바람구멍은 바람의 가슴에 뚫린 구멍이기에
그것도 바람은 바람이되
그러나 바람은 아니다
바람구멍이 바람을 잡자는 데서
바람은 슬프기 시작했다
하늘에 흩어진 알알들은
바람이 도망치는 뒷문이다
꼬리를 촟아가면 어느덧 저만큼
앞문으로 들어가는 바람인 것이다
초봄 동산에 올라
바람을 생각하며 영치기
바람처럼 웃어보자
바람은 떠돌고 가벼우며 고독한 존재다. 바람은 설움을 담고 다니지 않는다. 우리는 바람구멍, 바람이 나오는 곳이다. 바람의 어머니이고, 바람의 고향이다. 그것은 조국이고 역사이다. 그런데 이 바람구멍이 바람을 통제하고 구속한다. 바람은 할 수 없이 자기가 하늘에 뿌려놓은 설움에게로 간다. 설움은 바람을 놓아준다, 자유롭게 한다.
손님
언제부터런 말인가
슬픔이 우리의 손님이 된 것은
몰래 다가와서
사알짝 등 뒤로 눈을 감싸는
짓궂은 여자처럼 찾아온 것은
새초롬히 찾아온 손님이
시원스레 물러가는 법이란 없는 것이어서
등의자 풍경 시절에
노변(爐邊)의 긴 얘기 할
눈 내리는 밤의 은근한 즐거움을
꿈꾸며 찾아온 것이어니
어느 손이든
정중히 대접하는 것이
이 세상 예절
그러면 너
고달픈 길손
먼 길 떠나야 할 그때까지
오래
나하고 살잔?
슬픔은 우리의 손님이다. 손님은 화복의 주재자이다, 신이다. 슬픔은 손님으로 찾아와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이야기하려고 한다. 어차피 찾아온 손님이라면, 정중히 대접하고 품자. 자랑스럽지 않아도 나의 손님이면, 나의 상처면, 나의 역사면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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