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詩富), 시를 많이 지었다는 말이다.
시 부자라고 해서 살림이 넉넉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우리 감성에는 더 친숙하다.
하지만 한 수 시를 얻었을 때의 정서적 충일감은 다른 걸로 대체하기 어렵다.
하여 예로부터 시주머니[詩囊]에 가득한 천 수 시에 벅찬 감동을 노래한 시가 많다.
시주머니, 시낭(詩囊)이라는 말이 예쁜데, 실제 물건을 본 적은 없다.
졸수재 조성기(趙聖期)가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 1653-1725)에게 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시 넉넉하니 가난이 사무친들 뭐가 문제리 詩富何妨貧到骨
몸 한가하니 세상이 몰라준들 개의치 않네 身閑不厭世相輕
시 부자면 뼈에 사무치는 가난도 문제없다.
거짓이면서 참이다.
득시(得詩)의 희열을 체험한, 은밀한 눈맞춤의 천 번의 감동을 쌓아둔 사람이라면
이 말 뜻을 알 것이다.
이해인의 아래 시 또한 똑같은 마음의 노래이다.
졸수재는 그 시절의 이해인이고, 이해인은 오늘날의 졸수재이다.
내 안에 흐르는 시 (이해인)
내 안에 흐르는
피와 물처럼
보이지 않게 감추어 둔
생명의 말들
어느 날
시가 되어 쏟아지면
밖으로 쏟아진 만큼
나는 아프고
이로 인해 후유증이 심해도
나는 늘 행복하고
내 마음의 바다에는
해초처럼 떠다니는
푸른 시상(詩想)들
힘껏 걷어 올리고 나면
이미 퇴색하는 그 빛깔
끝내
햇볕을 보지 못하고
남아있는 언어들이
하도 많아서
나는
가난하게 살아도
항상 넉넉하구나 (시집 "시간의 얼굴",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