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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Y 구락부 전말기」 (최인훈, 1959)의 창(窓)

검하객 2025. 6. 7. 17:01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폐쇄와 자족을 선택한 몇몇 한량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들의 이 폐쇄와 자족은 지켜지지 않는다. 

여성 회원이 들어오면서 균열이 생겼고, 경찰에 의해 불온단체로 의심되면서 깨진다. 

이들의 세계관, 삶의 태도는 '창'에 대한 '현'의 단상으로 표현된다. 

꽤 긴 이 부분을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의 "To the lighthouse"가 떠올랐다. 

울프 소설의 1장 제목이 window이다. 

 

[단상]

 

  “움직임의 손발을 갖지 못하고, 내다보는 창문만을 가진 인간형이 있다. 손 하나 발 하나 까딱하긴 싫고, 다만 눈에 보이는 온갖 빛깔, 형태를 굶주린 듯 지켜봄으로써 보람을 느끼는 사람, 이런 사람은 타입의 사람이다. 창은 두 가지 몫이 엇갈린 물건이다. 창은 먼저, 밖으로부터 들어앉은 방을 막아준다. 거칠은(거친) 행동과, 운동의 번잡에 대한 보호를 뜻하는 건물의 한 군데인 것이다. 블라인드를 치고, 커튼은 드리우고, 덧창을 달고, 자물쇠를 채우고 하는 모든 것이, 이 창의 닫힘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창은 이같이 닫힌 집과 바깥과 오가기 위한 자리다. 창에서 이루어지는 바깥하고의 오가기는 오직 눈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눈으로 하는 사귐은 떨어져 있고 번거로움이 없다. 그는 화창한 삶의 봄과, 매서운 싸움의 겨울을 바라본다. 그는 즐거움에 몸을 불사르지 않는 한편, 괴로움에 대하여 저주하지도 않는다. ‘누리가 만들어진 것은 아무튼 좋은 일이었다하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이런 창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창 없는 집과 같다. 그는 좁은 생각과 외로움으로 숨 막히고 끝내 미칠 것이다. 그레이 구락부는 그러한 의 기사들의 기사단인 것이다. 그들은 투정보다는 노래하여야 할 것이 많은 누리를 받아들였다. 창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거의 아름다웠다. 창으로 바라보는 인물은 모두 소설 가운데 주인공처럼 흥미를 돋우며, ‘과 바깥과의 어울림속에 살아 있는 인물이었다. 창은 슬기 있는 사람의 망원경이며, 어리석은 자의 즐거움이 아닐까? 이것이 그레이 구락부의 믿음이다.”

  이것은 난로의 기사라는 벼슬을 받았을 때, 현이, 창에 가까운 자리를 변호하기 위해서 내놓은 말씀 가운데 한 대목을 옮긴 것이다. 어떻든 그레이 구락부는 창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것도 아무 데나 붙어 있는 너절한 게 아닌, 그런 창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구락부의 눈이었다. 말씨가 떨어지면 누구고 으레 이 창가로 온다. 동편으로 난 커다란 창문으로는, 이랑이랑 이어진 지붕을 거쳐, 멀리 남산 기슭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도시의 전모를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것은, 그것 스스로 사람으로 하여금 깊으디 깊은 속으로 끝 모르게 끌고 들어가는 힘이 있었다. 가지각색의 모양과 빛깔의 기와며 벽의 빛깔, 서울의 집들의 색채는 요즈음 들어 부쩍 울긋불긋해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집에다 울긋불긋 칠하는 것을 그닥 즐기지 않았던 모양이나, 지금은 안 그렇다. 맑게 갠 겨울 하늘 아래 굽이굽이 펼쳐진 지붕들의 색깔, 저 새빨간 양철 지붕 밑에는 사과꽃처럼 진한 삶이 있는 것일까. 저 새파란 지붕 밑에는 창포꽃처럼 숨쉬는 여자의 슬픔이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 모든 지붕()도 이 찬란한 저녁노을의 때가 되면, 빠짐없이 한 가지 잿빛의 너울을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