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처용단장

검하객 2013. 7. 24. 11:07

 

처용

김춘수(1922~2004), 1974, 민음사

 

처용단장(處容斷章) 제 1부

 

 

 

1의 1

 

바다가 왼종일 쉴 틈 없이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바다가 나를 본다, 감시․주시 당하는 나, 불안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어린 건 느릅나무 잎이 아니라 나의 내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흔들리는 것 또한 느릎나무 잎이 아니라 나의 내면

 

날이 저물자

내 근골(筋骨)과 근골 사이 몸, 육체를 파고드는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슬픈 운명 미물의 울음소리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지는 건 베꼬니아의 꽃잎이 아니라 붉은 나의 내면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밤새 그 많은 일이 있었어도 상황에는 변화가 없다

뚝, 뚝, 뚝, 천(阡)의 사과알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었다. 역시 떨어지는데, 하늘로 떨어진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겨울 밤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눈을 맞는다, 잠들지도 망각하지도 못하는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 비로소 본다, 감아야 볼 수 있다, 평소 나는 보여진다

 

 

 깨어있는 동안 나는 보이고 바람에 떨리고 거머리 우는 소리를 듣고 꽃잎이 되어 지고 감시당하고 사과알이 되어 깊은 하늘로 떨어진다. 그 사이 봄에서 가을까지 지났다. 겨울 밤이 되어 눈을 감고서야 나는 개동백 열매가 익는 것을 느끼고 눈이 내리는 장면을 본다.

 

 

 

 

1의 2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산다화는 동백꽃 / 景 (현상)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일어나 눈을 맞는 남도의 봄날에

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눈 맞는 봄이 일깨운 나의 수컷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물개 수컷은 자기 내면, 우는 소리 또한 / 情

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하지만 금방 사라진다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어루만지는 것이다, 피어나게 하는 것이다

 

 

큰 눈송이를 맞는 라일락 새순과 동백꽃을 보면서 육체적 사랑을 직관한 것이다. 3월의 눈은 얼리지 않고 적셔준다. 촉촉하게 한다. 어루만져준다. 그 장면에 화자는 자신의 남성이 깨어나는 걸 느꼈다. 수많은 암컷을 거느리는, 수컷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이다.

 

1의 3

 

 

 

壁이 걸어오고 있었다. 박혀 한 자리에 있어야 할 벽이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뿌리 내리고 있어야 할 홰나무가 / 욕망과 도전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낮에는 아니 그런데, 무의식 속에서는

濠洲 宣敎師네 집

廻廊의 壁에 걸린 靑銅時計누구에게나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폭력과 기계의 시간

거울도 다 갔는데

검고 긴 망토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기계적 시간 질서로부터의 탈출 / 나의 일탈 (카이로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무의식의 시간 속에서 나는 바다와 동침한다

잠자는 바다를 보면

바다는 또 제 품에 나와 바다는 조화롭고 평화로우며

숭어새끼를 한 마리 잠재우고 있었다. 바다와 숭어새끼도 다정하고 안온하다

 

다시 또 잠을 자기 위하여 나는

검고 긴

한밤의 망토 속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바다를 품에 안고

한 마리 숭어새끼와 함께 나는

다시 또 잠이 들곤 하였다.

*

호주 선교사네 집에는

호주에서 가지고 온 해와 바람이 나의 일상과는 다른 시간이 있는 곳

따로 또 있었다.

탱자나무 울 사이로

겨울에 죽두화가 피어 있었다.

主님 생일날 밤에는

눈이 내리고

내 눈썹과 눈썹 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나비가 날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이질적인 세계 속에서 시간과 공간은 나의 것이 되고, 거기서 친숙함을 체험한다. 크리스마스 날 밤의 꿈에서 말이다.

 

1의 4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겨울은 눈을 상실했다

바다는 가라앉고 나는 바다를 잃어버렸다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낯선 객이 등장하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친숙한 세계, 물새는 사라졌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사라지고도 여운과 흔적을 남기다 / 기억과 집착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성숙과 고통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나와 사나이의 대면. 사라진 바다를 바라보는 나, 죽은 바다를 수거한 사나이. 관념이 아닌, 현실 속에서 그 현실과 호흡하는, 죽음도 손으로 처리하는(만지는) 사나이. 이 사나이는 나의 결핍, 회피, 동경, 열등감이 어우러진 존재이다. 나는 내 안의 낯선 타자인 나를 만난다.

 

1의 5

 

 

아침에 내린

福童이의 눈과 壽童이의 눈은

두 마리의 금송아지가 되어

하늘로 갔다가

해질 무렵

저희 아버지의 외발 달구지에 실려

금간 쇠방울 소리를 내며

돌아오곤 하였다.

한밤에 내린

복동이의 눈과 수동이의 눈은 또

잠자는 내 닫힌 눈꺼플을

더운 물로 적시고 또 적시다가

동이 트기 전

저희 아버지의 외발 달구지에 실려

금간 쇠방울 소리를 내며

돌아가곤 하였다.

*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아침을 뭉개고

바다를 뭉개고 있었다.

먼저 핀 산다화 한 송이가

시들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서넛 둘러앉아

불을 지피고 있었다.

아이들의 목덜미에도 불 속으로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1의 6

 

 

木瓜나무 그늘로

느린 햇발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景 1

지는 석양을 받은

적은 비탈 위

구기자 몇 알이 올리브빛으로 타고 있었다. 景 2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쉬게 하는

어항에는 크낙한 바다가

저물고 있었다. 景中情, 작은 어항은 금붕어에게는 바다 / 역설

Vou 하고 뱃고동이 두 번 울었다. 바다의 소리, 景 3

木瓜나무 그늘로

느린 햇발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느리게 가는 시간 / 순간의 단상

장난감 분수의 물보라가 ‘장난감 분수’가 뭘까?

솟았다간

하얗게 쓰러지곤 하였다.

 

點景의 포착, 點描.

 

 

 

1의 7

 

 

새장에는 새똥 냄새도 오히려 향긋한

저녁이 오고 있었다. 평화로운, 나른한, 체념의 시간

잡혀온 산새의 눈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무력하게 옛날을, 밖을 꿈꾸는 시간

눈 속에서 눈을 먹고 겨울에 익는 열매

붉은 열매. 산새의 눈에 포착된 풍경

봄은 한잎 두잎 벚꽃이 지고 있었다.

입에 바람개비를 물고 한 아이가

비 개인 해안통을 달리고 있었다. 화자의 환영 1

한 계집아이는 고운 목소리로

산토끼 토끼야를 부르면서

잡목림 너머 보리밭 위에 깔린

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화자의 환영 2

 

 

봄날 저녁의 나른한 환영. 산새의 꿈과 화자의 환영은 등치. 산새의 꿈 또한 화자의 꿈이 투사된 것이다. 그것은 이젠 사라진, 되돌아갈 수 없는 장면이다. 나는 새장 속에 갇혀 있고, 시간에 구속되어 있다. 모든 것은 소멸하였으며, 나는 그저 떠올릴 뿐이다.

 

 

 

1의 8

 

 

내 손바닥에 고인 바다,

그때의 어리디 어린 바다는 밤이었다. 어린 시절의 바다

새끼 무수리가 처음의 깃을 치고 있었다. 물수리 새끼가 하늘을 나는 꿈을 꾸던 곳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동안 세월, 성장

바다는 많이 자라서

허리까지 가슴까지 내 살을 적시고

내 살에 테 굵은 얼룩을 지우곤 하였다. 흔적과 흉터

바다에 젖은

바다의 새하얀 모래톱을 달릴 때

즐겁고도 슬픈 빛나는 노래를

나는 혼자서만 부르고 있었다. 고독과 자유

여름이 다한 어느 날이던가 나는 가을, 성숙

커다란 해바라기가 한 송이

다 자란 바다의 가장 살찐 곳에 떨어져

점점점 바다를 덮는 것을 보았다. 바다의 축소, 비만, 은폐, 소멸

 

원래 바다는 나의 손바닥에 고여 있었다. 손바닥은 마음이고, 마음은 동심이다. 동심 속의 바다는, 물수리 새끼가 나는 연습을 하는 곳이었다. 세월이 지나 나는 성숙하여 어른이 되었고, 바다는 그 사이 비만해졌고, 결국은 덮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1의 9

 

 

팔다리를 뽑힌 게가 한 마리

길게 파인 수렁을 가고 있었다.

길게 파인 수렁의 개나리꽃 그늘을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가고 있었다.

등에 업힌 듯한 그

두 개의 눈이 한없이 무겁게만 보였다.

 

 

팔 다리가 없는, 운신할 수 없는 자기 자신. 자기가 바라보는 자신의 눈. 보아야 하는, 그래서 방향과 동작을 판단하게 하는 눈. 하지만 그 눈은 유난히 피곤하다. 팔 다리가

없어 행보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건 모두 ‘나’이다. 팔 다리가 없는 것도, 눈이 무거운 것도 모두 나이다.

 

1의 10

 

 

은종이의 天使는

울고 있었다.

누가 코밑수염을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운명, 피투

제가 우는 눈물의 무게로

한쪽 어깨가 조금 기울고 있었다. 슬픔이 짓누르는 무게

조금 기운 천사의

어깨 너머로

얼룩암소가 아이를 낳고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얼룩암소도 새벽까지 울고 있었다. 태어남은 인연의 슬픈 결과이다

그 해 겨울은 눈이

그 언저리에만 오고 있었다.

 

 

모든 존재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고 형태지워진다. 또한 자기 자신이다. 또 모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난다. 그러한 인연의 연속이다. 그렇게 태어난 얼룩암소는 새끼를 낳으면서 자기 신세와 더불어 태어나고 있는 새끼의 운명이 서러운 것이다.

 

 

 

1의 11

 

 

울지 말자

山茶花가 바다로 지고 있었다.

꽃잎 하나로 바다는 가리워지고

바다는 비로소

밝은 날의 제 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발가벗은 바다를 바라보면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雪晴의 하늘 깊이

울지 말자,

산다화가 바다로 지고 있었다.

 

 

동백꽃은 바다로 질 수 없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산다화가 바다로 졌다. 일상을 넘어선 만남이다. 바다는 자신을 감추고 있었는데, 산다화 잎이 닿으면서 깨어난다. 지는 꽃잎 하나의 사연과 비밀과 운명. 일상을 넘어선 누군가의 운명이 닿으면서 바다는 전신이 감촉했고, 그 순간 속살이 드러났다.

 

1의 12

 

 

겨울이 다 가도록 운동장의

짧고 실한 長椅子의 다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짧고 실한 의자지만 흔들리는 것으로 보이고

겨울이 다 가도록

아이들의 목덜미는 모두

눈에 덮인 가파른 비탈이었다. 아이들의 고운 목덜미도 비탈로 보였다

산토끼의 바보, 활력과 탄력과 예민의 표상 산토끼

무릎팍에 피를 조금 흘리고 그때

너는 거짓말처럼 죽어 있었다. 부적응자, 열등자, 패배자

봄이 와서

바람은 또 한번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릎나무 어린 잎을 흔들던 그 바람

겨울에 죽은 네 무르팍의 피를

바다가 씻어주고 있었다.

산토끼의 바보,

너는 죽어 바다로 가서 산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죽은 산토끼는 죽어 바다로 갔다

밝은 날 햇살 퍼지는

내 조그마한 눈웃음이 되고 있었다. 죽음을 통한 정화와 치유

 

혹독한 겨울. 짧고 실하여 잘 흔들리지 않는 긴 의자도 내내 흔들렸고, 아이들의 고운 목덜미도 가파른 비탈길로 보였다. 이 겨울에, 예민하고 탄력 넘치며 재빠른 산토끼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죽었다. 산토끼는 겨울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봄은 찾아왔고, 한려수도에서 부는 바람은 토끼 무릎의 피를 씻어주었다. 산토끼는 죽어 꿈꾸었던 바다로 갔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동경의 세계로 간 것이다. 산토끼의 패배이자 승리이며, 화자의 상처이자 몽상이다.

 

 

 

1의 13

 

 

봄은 가고

그득히 비어 있던 풀밭 위 여름,

네잎 토끼풀 하나,

상수리나무 잎들의

바다가 조금씩 채우고 있었다.

언제나 거기서부터 먼저

느린 햇발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이 있었고

탱자나무 가시에 찔린

西녘 하늘이 내 옆구리에

아프디 아픈 새발톱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시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슴에 남지 않는 노래말 (임진모)  (0) 2013.08.31
낭비의 맛  (0) 2013.08.25
손님  (0) 2013.06.12
용장사의 몇 詩痕  (0) 2013.06.05
비유  (0) 2013.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