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김성탄이 그리워졌다. 최근 6,7년 동안 한해도 김성탄을 만나지 않았던 적이 없는 거 같다. 마치 사는 게 바빠 오랜 벗과 격조했던 것처럼 말이다. 청대 필기에 나타난 김성탄의 형상 몇몇을 찾아보았다. 과거 관련 이야기가 많았다. 과거는 조정과 관리, 나아가 황제와 국가의 상징이다. 이야기 속에서 김성탄은 과거의 권위를 무시하고 고시관을 조롱한다. 이는 실제와는 다르다. 김성탄은 간절하게 관직에 나아가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과거? 많은 사람들이 불신하고 혐오하였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걸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람들은 가면을 쓰거나 배우를 내세운다. 다른 누군가에게 대신 말하게 하는 것이다. 청대에 그렇게 선택된 배우 중 하나가 바로 김성탄이었다. 고증과 번역이 부실한대로 몇 사례를 올려둔다.
? 원래 이름은 張采였다. 한번은 한 무리의 秀才, 監生들과 문묘에서 공자를 제향하였다. 전례가 막 끝나가는데 반듯하고 온아한 학인들이 갑자기 우르르 몰려 올라와 제상 위의 돼지머리와 만두를 차지하느라 온갖 추태를 보였다. 당시 독서인들에게는 공자 제향 상의 돼지머리고기와 만두를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높이 승진한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채는 이 광경을 보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打油诗를 읊으며 야유했다.
날 저물어 제향을 끝마쳤는데 天晚祭祀了
갑자기 다툼 소리 요란하구나忽然鬧吵吵
돼지고기 살진 것 서로 다투고祭肉爭肥瘦
큰 만두 차지하려 빼앗는도다饅頭搶大小
안회는 고개를 숙인 채 웃고顏回低頭笑
자로는 다리로 날뛰는구나子路把腳跳
선생께선 한숨 쉬며 탄식하는데夫子喟然歎
두통이 안팎에서 쌍으로 오네晃頭雙搖腦
진나라서 식량이 없을 때에는在陳我缺糧
굶어죽는 사람이 아니 그쳤지未見止餓殍
이로부터 이름을 김성탄으로 바꾸었다. 金은 우상의 金身을, 성탄은 성인 공자의 탄식을 의미한다.
* 공자는 말했다. “안타깝도다! 나는 그가 나아가는 것은 보았어도 그치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惜乎! 吾見其進也, 未見其止也.” (안연)
? 다음은 《清朝野史大观·艺苑》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김성탄이 젊어서 縣試에 참여했다. (→ 出身 → 府試 → 院試 → 부학이나 현학 입학 자격 취득 → 鄕試) 시험의 제목은 ‘西子不來’. 월나라 미녀 서시가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일을 풀어내라는 뜻이지만, 일부러 우스개 답안을 제출했다. “開東門,西子不來, 開南門,西子不來, 開北門,西子不來, 獨開西門而西子來矣.” 채점관은 이 답안을 보고 又气又恼하여 “秀才去矣” 넉 자를 적었다.
김성탄은 이 노선생을 놀려줄 마음을 먹었다. 이듬해 이름을 바꿔 다시 과거를 보러 갔다. 고시관이 낸 제목은 ‘王之將出’이었다. 김성탄은 코웃음을 쳤다. 한 글자도 쓰지 않고 종이 위에 다섯 개의 동그라미를 그렸는데, 가운데 한 개는 크게 하고 양쪽의 두 개는 작게 만들었다. 문제를 내자마자 답안을 낸 것이 이상하여 김성탄을 불러 물었다. 김성탄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선생께선 연희를 보신 적이 없습니까? 무대 위에서 왕이 출타하려고 할 때엔 4명의 跑龍套가 먼저 나와 가슴을 내밀고 배를 집어넣은 채 무대 양쪽에 서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고시관은 얼굴이 붉어져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 1차 시험에 참가했는데 시제가 “吾豈匏瓜也哉,焉能繫而不食.”이었다. 그는 답안지에 한 사람의 민머리 중과 한 자루 머리 깎는 칼을 그렸다. (光頭和尚,一把剃刀) 시험관이 묻자, 대답했다. “이 또한 匏瓜의 意形입니다. 시험관은 크게 화를 냈다. 김성탄은 대답했다. 두 번째 참가한 과거에서 시제는 “吾四十而不動心.”이었다. 김성탄은 39차례나 “動心”을 적었다. 고관의 물음에 대답했다. “맹자가 나이 마흔에 不動心이라 했으니, 그 이전에는 반드시 마음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또 떨어졌다. 나머지 하나는 西子不來.
? 김성탄이 옥중에서 처자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字付大儿看,腌菜与黄豆同吃,大有胡桃滋味. 此法一传,我无憾矣.” 형장에서는 두 아이에게 말했다. “얘들아, 너희들에게 꼭 알려줘야 할 게 있단다. 오향 두부를 먹을 때 땅콩과 함께 씹으면 그 맛이 火腿와 똑같단다. 이건 비밀이니 절대로 남에게 말하지 말거라.” 그날 함박눈이 내렸다. 김성탄은 죽기 전에 한 수의 打油詩를 지었다.
하늘도 날 애도하고 땅 또한 근심하니天悲悼我地亦憂
만리의 산과 강이 머리 온통 희었구나萬里河山戴白頭
날 새면 강과 산이 찾아와 조문할 제明日河山来吊唁
이 세상 집집마다 길게 눈물 흘리리라家家户户淚長流
? ‘殺鷄’가 시제로 나왔다. 그의 답안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爲雄鷄,爲雌雞,不雄不雌爲閹雞,姑勿論也,殺之而已矣. 爲紅雞,爲白雞,不紅不白爲花雞矣,姑勿論也,殺之而已矣.”
? 행운이 따른 적도 있었다. 그 과거의 시제는 “原壤夷侯,闕黨童子將見”였다. 그의 답안 중에 “原攘夷侯,夫子以杖叩其頭,原攘三魂渺渺,七魄茫茫,一陣清風,化而爲闕黨童子.” 시험관이 크게 감탄하며 합격시켰다. (논어 헌문)
? 첫 번째 향시의 시제는 ‘孟子將見王”이었다. 김성탄은 답안지의 네 모퉁이에 ’吁‘ 자를 썼다. 照例主考官又被雷焦了. 김성탄이 풀어주었다. “빈 칸을 채우며 시제를 읽어보니 모두 40여 차례 孟子를 썼는데 중복하지 않았습니다. 見王의 경우, 양혜왕, 양양왕, 제선왕을 보는 것이 모두 별 차이가 없어 다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만 將 자는 적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연희를 보신 적이 없습니까? 왕께서 조회에 오르기 전에는 모두 네 명의 내시가 주변에 있어 吁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바로 將의 뜻입니다.
? 1차 생원 시험의 제목이 ‘如此则动心否乎’였다. 김성탄은 적었다. “空山窮谷之中,黄金萬两, 露白葭蒼而外,有一美人,試問夫子動心否乎? 曰, 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動” 고관이 하나하나 세어보니 39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