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게으른 독서

검하객 2014. 8. 1. 17:25

 30년 전 대학 1,2학년 여름방학이면, 마루에 누워 뒹굴대다가 등나무 아래 가 앉아, 아주 게으르게 "분노의 포도" 같은 소설이나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의 책을 읽던 장면이 떠오른다. 정말 게으른 시절이었다. 그 이후로 군대에 갔고, 복학하고 대학원 진학한 뒤로는 그런 게으름이 없어졌다. 아주 오랜만에 요 며칠 게으르게 보내고 있다. 엊그제 신문의 책 소개 기사를 보고 "장하준의 경제학강의"를 주문했고, 어제 도착했고, 어제 오늘 손에 잡히는대로 읽어보았다. 경제학이야 내가 뭘 알겠는가마는, 자기가 공부한 특정 이론을 절대화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떠들어대는, 세상의 대다수 병든 교수들의 글 같지 않아 좋았다. 장하준은 매우 총명하고 성실하면서, 겸허하고 건강한 사유를 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드문 '건전한 지식인'이랄까!  별책 부록으로 딸려온 "장하준의 Shall We"에서 인상적인 몇몇 구절을 추려 옮겨본다.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학적 논쟁을 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 (키케로)

 

  경제학적 주장에 실린 정치적 색채의 예로는 낙수 효과 이론, 경제학적 주장이 의도치 않게 일부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작용한 예로는 파레토 기준.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과학적' 분석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는 절대 믿어서 안 된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좌로는 크메르 루주에서부터 우로는 신자유주의 시장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견해를 과도하게 확신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쳤다."

 

  이 말은 <장미의 이름>의 마지막 장에서 윌리엄 신부가 들려주는 다음 말과 상통한다.

 

  "오늘 우리는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가짜 그리스도는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성자 중에서 이단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이윤기 역)

 

  경제는 정치이고 경제는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게 제 중요한 주장 중 하나입니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경제학자들 자체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가 경제학을 쓸 때는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이었습니다. 그때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죠. 20세기 들어 신고전주의학파가 득세하면서 이를 경제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경제학은 과학이니까 정치 논리나 도덕적 윤리 기준은 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식으로 경제학을 탈정치화된 학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시장은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동 노동을 금지한다든지 개인적으로 돈을 찍어내지 못학 한다든지 하는 규제들은 우리가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도 못합니다. 박정희 정부 때 의무교육이 임금을 30%나 오르게 했습니다. 의무교육이 12세로 연장되어 노동 시장에서 수백만 명의 아동 노동력이 없어지면서 생긴 현상입니다. 정책이 시장을 바꿉니다.

 

  장하준의 비판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향하고 있다. 그 중심 과녁은 그들의 학설이라기보다는 자기 학설의 절대적 객관성을 과신하는, 하여 스스로 오류의 가능성을 닫고 다른 입장과 견해를 철저학게 묵살하는 그들의 태도이다. 장하준은 "경제학은 정치학"이라는 명제를 전제한다. 이에 반해 신고전주의 경제학은 "경제학은 과학"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장하준의 건강은 모든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에 있다. 술을 못한다니 아쉽다. 고흥집으로 초대하여 그저 두어 시간 함께 술을 마셔보고 싶은 사람이다.

 

  18,9세기에는 정치경제학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의 과목명도 정치경제, 줄여 정경이었다. 정치경제가 따로 나뉘어진 것도 신고전주의의 영향 때문인가? 전반적인 과화 추세의 반영일 수도 있겠다. 역사지리가 역사와 지리로 나뉜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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