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연필깎기

검하객 2012. 8. 13. 11:59

왠지 마음이 가다듬어지지 않을 때는 필통과 가방을 뒤져 연필들을 모두 꺼낸다. 끝이 짧게 뭉뚝해진 놈도 있고 아예 심이 부러진 놈도 있으며 모두 멀쩡한데 왠지 때가 타 지저분해진 놈도 있다. 옆에 두고 칼을 잡아 한놈 한놈 깎아준다. 10여분 뒤 길이도 무늬도 제각각인 연필 7,8자루는 새로운 면모로 도열한다. 하나 하나 집어 들고 끝에 눈을 맡추며 손가락 끝의 질감을 느껴본다. 멀리 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돌려 보기도 한다. 됐다. 보검을 만드는 장인의 마음이 이러할까. 그중에서 제일 짧은 놈을 골라 들고 나머지는 필통 속에 거꾸로 꽂는다. 다루기 쉬운, 하나 간편하고 강인한 단필을 잡은 것이다. 이제 든든한 마음으로 집을 나서 字林 속으로 들어간다. 강자를 만났을 때는 한참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생각에 잠길 것이고, 멋진 놈을 만나면 그 아래 일획을 그을 것이며, 때로 기막힌 생각이 나오면 무심필법으로 여백에서 춤을 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