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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의 <발해고서>

검하객 2015. 8. 8. 13:31

 유득공을 알기 위해서는 이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남의 땅이 탐나서도 아니요, 누구를 짓누르고 싶어서도 아니니, 그저 사라진 세월이 전혀 기억되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문장도 훌륭하거니와 그 뜻은 더욱 가상하다.  지나간 일이야 소용 없고, 앞으로는 이 글 한 편을 국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록의 의미도 모를 뿐더러, 기록을 무서워하는 모지란 것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단국대 앞 할리스 까페에서 송화강 논문을 쓰다가, 통창 밖으로 선글라스 낀 여인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여기에 미쳤다.  

 

 

고려가 발해의 역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그것만으로 고려가 떨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 고씨가 북쪽에 자리 잡아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을 차지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김씨가 동남쪽을 다스려 신라라 하였다. 이를 일러 3국이라 하니 마땅히 3국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고려가 그것을 했으니 잘한 일이다. 부여씨와 고씨가 망한 뒤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하였고, 대씨가 북쪽을 다스려 발해라 하였다. 이를 남북국이라 하니 의당 남북국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이 일을 하지 않았으니 잘못한 것이다. 대씨는 어디 사람인가,고구려 사람이다. 차지한 땅은 어디 땅인가, 고구려 땅이다. 동서북쪽을 개척하여 넓히기까지 했다. 김씨와 대씨가 망하고 왕씨가 나라를 통일하여 고려라고 했다. 남쪽의 땅은 다 차지했지만 북쪽 대씨의 땅은 거두지 못했으니 일부는 여진에 들어가고 거란의 차지가 되었다. 당시 고려를 위해 계책을 세운 자라면 의당 서둘러 발해사를 편찬했어야 했다. 하여 그 책을 들고 여진을 꾸짖어 어찌 우리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의 땅은 옛 고구려의 땅이거늘.”라 하고, 장군 하나를 보내 거두게 했다면 토문강 북쪽의 땅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또 그 책을 들고 거란을 꾸짖어, “어찌 우리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의 땅은 옛 고구려의 땅이거늘.”라 하고, 장군 하나를 보내 거두게 했다면 압록강 서쪽의 땅을 가졌을 것이다. 헌데 끝내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의 땅이 누구 차지가 되었더란 말인가? 여진을 꾸짖고 싶어도 근거가 없고, 거란에게 따지고 싶어도 명분이 없었다. 고려가 끝내 약국이 되고 만 것은 발해의 땅을 얻지 못한 까닭이니, 안타까움을 이길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발해는 요나라에게 망했는데 고려가 무슨 수로 역사를 짓는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발해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였으니 사관을 두었을 것이 틀림없다. 忽汗城이 함락되었을 때, 세자 이하 고려로 달아난 이가 10만이 넘었다. 사관이 없다면 책이라도 있었을 것이요, 사관과 문헌이 없었다고 치자. 세자에게 물으면 그 世系, 대부 隱繼宗에게 물었다면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10만이 넘는 사람에게 물었다면 무엇을 알아내지 못했을까? 張建章은 당나라 사람인데도 발해국기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으로 발해사를 지을 수 없었단 말인가! 슬프다, 문헌이 흩어져 없어진 지 수백 년이 지난 뒤, 짓고자 한들 자료를 얻을 방법이 없다. 나는 내각에 있으면서 그 안의 비서를 제법 읽어 발해의 일을 편찬하였다. 君臣地理, 職官儀章, 物産國語, 그리고 國書 등 항목을 아홉으로 나누었다. 世家, 아니면 라 아니 하고 라 이름붙인 것은 온전한 역사가 못 되기 때문이며, 내가 감히 史家를 자처하기 어려운 이유도 작용했다.

 

高麗不修渤海史, 知高麗之不振也. 昔者高氏居于北曰高句麗, 扶餘氏居于西南曰百濟, 朴昔金氏居于東南曰新羅, 是謂三國, 宜其有三國史, 而高麗修之, 是矣. 扶餘氏亡高氏亡,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曰渤海, 是謂南北國, 宜其有南北國史, 而高麗不修之, 非矣. 夫大氏何人也, 乃高句麗之人也. 其所有之地何地也, 乃高句麗之地也. 而斥其東斥其西斥其北而大之耳. 及夫金氏亡大氏亡, 王氏統而有之曰高麗, 其南有金氏之地則全, 而其北有大氏之地則不全, 或入於女眞, 或入於契丹當是時, 爲高麗計者, 宜急修渤海史, 執而責諸女眞曰, 何不歸我渤海之地, 渤海之地, 乃高句麗之地也, 使一將軍往收之, 土門以北可有也. 執而責諸契丹曰, 何不歸我渤海之地, 渤海之地, 乃高句麗之地也, 使一將軍往收之, 鴨綠以西可有也. 竟不修渤海史, 使土門以北鴨綠以西, 不知爲誰氏之地. 欲責女眞而無其辭, 欲責契丹而無其辭, 高麗遂爲弱國者, 未得渤海之地故也, 可勝歎哉. 或曰, 渤海爲遼所滅, 高麗何從而修其史乎. 此有不然者, 渤海憲象中國, 必立史官, 其忽汗城之破也, 世子以下奔高麗者十餘萬人, 無其官則必有其書矣, 無其官無其書, 而問於世子, 則其世可知也. 問於其大夫隱繼宗, 則其禮可知也. 問於十餘萬人, 則無不可知也. 張建章唐人也, 尙著渤海國記, 以高麗之人而獨不可修渤海之史乎. 嗚呼, 文獻散亡幾百年之後, 雖欲修之, 不可得矣. 余在內閣, 頗讀中秘書, 遂撰次渤海事, 爲君臣地理職官儀章物産國語國書屬國九考, 不曰世家傳志, 而曰考者, 未成史也, 亦不敢以史自居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