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겨울밤의 모자수작(母子酬酌)

검하객 2015. 12. 6. 23:44

  <응답하라 1988>을 보다가 내가 군복무를 마친 그 해 우리들 나이를 헤아려보니 이젠 세상에 아니 계신 아버지는 지금 나보다 겨우 한 살이 많았고 어머니는 꽃다운 48살 청춘이었더라. 문득 공중에서 포크레인만한 해머가 날아와 내 머리를 내려치더니, 가슴속 어디선가 산더미같은 설움의 해일이 밀려와 작은 몸을 삼켜버렸다. 밤이 깊어서야 불을 끄고 누웠으나 영혼은 명왕성처럼 반짝였다.

 

  21살 딸아이와 서로 상처를 주고받은 일요일 밤, 쓰라림을 못이겨 바를 약을 찾다가 옷을 껴입고 집을 나섰다. 잠든 노모를 깨워 술 한 잔을 청했더니, 달그락 두어 소리 뒤에 늙어가는 모자는 소주 한 병 잔 두 개 안주 세 접시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어머니는 오늘따라 군소리 없이 술을 따랐고, 나는 어머니 한잔 하십시다 하며 잔을 부딪쳤다. 일요일엔 이렇게 어머니랑 한잔 해야겠네 하자, 굳이 마다하는 내색을 아니 보이시는데, 오랜 세월 쌓여 익은 외로움이 투병향(透甁香)처럼 물씬 풍겼다. 예전에는 맡지 못하던 향내, 어느새 모자는 쓸쓸한 세월을 함께 하는 술벗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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