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학회에 참석하여, 공부하기로 작정하고 다섯 편 발표를 모두 들었다. 사이사이 졸며 부족한 잠도 채웠으며, 마음 통할 법한 연구자도 만났으니,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헐어 불 때고 1석 3조이다.
김만중(1637~1692). 돌이켜보면 한번도 제대로 김만중을 만나본 적이 없다. 2월에는 "서포 김만중의 생애와 문학" (김병국, 서울대출판부), "서포연보"(김병국 외), "서포집"을 읽어봐야겠다. "구운몽"은 선천 유배 시절인 1687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나이 51세 때이다. 선천에서 해배된 김만중은 1689년(53) 다시 남해로 정배되고, 1692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다. 1687년 9월 25일 유배지에서 지은 <九月二十五日謫中作>의 두 번째 수에 "遙想北堂思子淚, 半緣死別半生離."란 구절이 있다. 유배 오기 전 해인 1686년 형 김만기가 죽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선천 유배 시절의 시 몇 수가 마음을 끈다. 다음은 <塞邑> 2.
邊城夜擊柝, 驚鳥不安棲. 驛路淸江北, 胡山落月西. 家書數紙盡, 歸夢五更迷. 謾擬詩消遣, 詩今亦懶題.
2구의 새는 불안하게 깃든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깃들지 못한다라고 풀어야 한다. 놀란 새는 자기 심리의 투영이다. 驛路는 평양에서 의주로 이어지는 관서대로, 사행로이다. 5구는 종이가 다 떨어진 게 아니라 사연이 많아 몇 장이나 썼다는 뜻이고, 그러다보니 집과 가족 생각이 간절하여 꿈속에서도 그곳을 찾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하루는 普光寺의 승려 雪洞에게 불서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그 사연을 시로 남겼다. 제목은 <次普光僧雪泂韻 乞佛書>.
客懷蕭瑟易成哀, 雪擁柴荊午未開. 謫裏相隨無二友, 須君遠寄貝書來.
프로이트는 종교의 의례를 강박증 행동으로 보았다. 불교는 상대적으로 다른 종교에 비해 그런 요소가 약하거나, 그 안에 그렇지 않은 요소를 품고 있다. 명징한 질서나 확고한 신념을 강요하지 않는 요소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의 구속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불교를 찾는 이유이고, 그것이 불교의 매력이고 힘이다. 강요하지 않으며, 의심과 무지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 말이다. "소동파는 도연명과 위응물의 시집을 남방으로 유배 갔을 때의 두 벗으로 불렀다"[東坡號陶韋集爲南遷二友]는 주석을 달아놓았다. 김만중은 불서에서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눈 쌓인 초가 안에서 꼼짝도 않고 있는 초로의 문사 모습이 그려진다. 雪洞이 "능엄경"과 "원각경"을 보내주었다. 서포는 시를 보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제목은 <雪泂借寄楞嚴圓覺 詩以謝之>.
泂公知我晝饒眠, 爲寄珠函貝葉編. 戰退睡魔三百萬, 菩提樹影滿窓前.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니 낮잠을 잘밖에. 헌데 설동이 보내준 불서가 얼마나 좋았냐 하면, 그걸로 졸음을 몰고 오는 3백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호, 이런 표현, 그 장면을 상상만 해도 통쾌하다. 한참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난데 없이 보리수 나무 그림자가 창문에 가득 어른거린다. 보리수, 석가가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보리수 아래 석가처럼, 서포의 마음속에 그득하던 번뇌와 우울, 분노와 비애들이 씻은 듯 사라졌다. 뒤의 두 구절은 정지상의 "琳宮梵語罷, 天色淨琉璃."만큼이나 좋다.
작품은 신재홍, <김만중의 유배생활과 우울증, 그리고 구운몽 창작>에서 거론된 것들이고, 소감은 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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