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가도 가도 往十里

검하객 2017. 4. 18. 17:25

왕십리 (김소월, 1923)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왓스면 죠치

 

여드레 스무 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朔望(삭망)이면 간다고 햇지

가도 가도 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냐거든

往十里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마자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天安(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저젓서 느러젓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왓스면 죠치

구름도 마루에 걸려서 운다

 

 

발표 - 19238신천지9. 김소월은 16234월 일본에 가 도쿄상과대학에 입학했지만, 9월 관동대지진의 발발하는 바람에 귀국한다. 일본에 있을 때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소월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왕십리(往十里) - 조선 초부터 16세기까지 약 200년 간 현 왕십리 일대의 지명은 往心(, , ), 枉尋, 往尋(, ), 往尋里(), 王審里, 旺心(), 枉心驛(김시습) 등이었다. 기록상 往十里란 지명은 선조실록3414, 서기 1601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에는 보편화되었다.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의 도읍지 선정 과정에서, 농부 차림의 도선국사가 “10리를 더 가라.”고 알려준 데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은 민간 설화로 전승된 것이다. 기록상 무학대사가 도읍지 선정에 관여했다는 이야기도 차천로(1556~1615)오산설림초고에 처음 보인다. 이중환(1690~1756)택리지에도 비슷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 시에서 往十里는 실제 지명이기는 하지만, 시인의 체험적 장소라기보다는 무학대사 설화에서 비롯된 축자적 의미가 추상적으로 활용된 지명으로 보인다. 그것은 가도 가도 往十里란 표현에 잘 드러난다. 가도 또 가지만,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는 여전히 10리를 더 가야 하는, 막막감과 피로감을 자아내는 곳이 왕십리인 셈이다.

 

1- 실제 이 시는 비 내리는 도쿄에서 착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 내리는 이국, 그것도 식민 종주국의 수도에서 22살 청년은 아련한 감회에 젖는다. 그 감회는 19426월 교토에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쉽게 씌어진 시)라고 읊조린 26살 윤동주(1917~1945)의 정서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일상에서 비가 야기하는 것은 활동의 중단또는 시선의 내향이다. 일체의 모든 것이 중단되면서 내면 어두운 곳으로 깊이 침잠하고 싶은 마음.

 

2- 보통 여드레 스무 날스무여드레 날’(28)의 도치 표현으로 해석된다. ‘朔望은 음력 초하루와 보름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초하루)’의 뜻으로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똑같은 뜻을 지닌 다른 단어를 반복 사용하여 운율을 살리고 의미를 강조한 것인데, 문법적으로는 틀린 표현이다. 누군가(무엇인가) 왔다가 사흘 만에 떠난다는 말인데, 그 주체와 대상의 지시 의미가 분명치 않다. 무언가 있기는 한데 흐릿하여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 가고 또 가도 아직 10리를 더 가야 하는데 비까지 내린다. 그리고 목적지도 분명치 않다. 목적과 목표가 분명치 않은 막막감, 이것이 22살 청년의 내면이다.

 

3- 막막한 화자의 눈에 비 맞아 울고 있는 작은 새, 벌새 한 마리가 포착되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왕십리도 못 가서 울고 있다. 왕십리에서도 10리를 더 가야 하는데, 게까지도 이르지 못했으니 더 많은 거리가 남은 셈이다. 나는 그나마 왕십리에라도 와있는데 말이다. 벌새는 외부 풍경의 한 점 사물인, 자아 내면이 투영된 객관적 상관물이다. 그것은 나이면서 벌새이니, 옛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두고 정경교융(情景交融)이라고 했다.

 

4- 느닷없이 천안 삼거리가 나오니, 또한 시인이 처해 있는 장소가 아니라 상상의 공간이다. 비에 젖어 축축 늘어지는 마음이 자신의 표상으로 똑같은 모양의 실버들을 떠올린 것이다. 가뜩이나 무력하고 막막한 나는 설상가상으로 비 맞아 늘어진 실버들처럼 축축 늘어진다. 이럴 바엔 차라리 닷새쯤 비가 내리면 좋겠다. 산마루를 넘지 못하고 비를 뿌리고 있는 구름은, 고비를 넘지 못한 채 울고 있는 나 자신이다.

 

이 시는 22살 청년 김소월의 자화상이다. 그 시대 목표와 방향을 상실한 식민지 청년들을 위한 代哭이다. 휴화산 지하에서 폭발을 기다리고 있는 마그마이다. 강가에서 물을 마시다가 문득 악어의 퉁방울 같은 눈과 시선이 마주친 새끼 누의 놀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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