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폐허, 190년의 洛陽 (삼국연의 6회)

검하객 2017. 11. 30. 11:55

 

  헌제 初平 원년(190), 袁紹를 맹주로 한 연합 의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董卓은 천자를 핍박하여 장안으로 천도한다. 그 전에 부호들의 재물을 빼앗고, 조종의 능침을 파헤쳤으며, 궁궐에는 불을 질렀다. 孫堅이 虎牢關을 돌파하여 입성했을 때 낙양성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 와중에 孫堅은 전국 옥새를 발견한다. 옥새를 얻고 흥분한 손견은 야심을 품고 강동으로 돌아가다가, 荊州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192년) 단독으로 동탁 추격에 나선 조조는 패전하고 겨우 목숨만 구해 돌아왔다가 원소에 크게 실망하여 揚州로 간다. 이때 揚州가 지금 江蘇省의 도시인지, 아니면 九州의 하나로서 淮河와 長江 사이 지역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아마 그의 祖籍地인 譙郡(안휘성 亳州 일대)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지? (실제로는 191년 東郡太守가 된다.) 유비는 공손찬의 권유를 받고 자신의 임지인 平原으로 돌아간다. (실제론 191년 처음 평원현령이 된다.) 平原은 현재 산동성 북부 德州市에 속한 縣이다. 당시 조조와 손견은 37세, 유비는 불과 31세였다.) 이어 원소도 군사를 거두어 北平(지금의 북경)으로 철수한다. 190, 191년에 걸쳐 일어난 일들을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한 때의 사건으로 묶어 처리했다. 어쨌건 황제가 떠나고, 백성이 떠나고, 손견이 떠나고, 조조가 떠나고, 유비가 떠나고, 원소마저 떠난 190년의 낙양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폐허였다.

  모종강은 낙양에 입성한 손견이 열성조의 신위를 다시 배설하고 제사를 지내고 난 장면에, 다른 설명 없이 "明月自來還自去, 更無人倚玉欄杆."란 평어를 달았다. 이는 안록산 사사명의 난을 겪은 장안의 풍경을 읊은 崔橹의 7언 절구 华清宫」의 뒷 두 구절로, 앞의 두 구는  "草遮回磴絕鳴鸞, 雲樹深深碧殿寒."이다. 아마도 모종강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두보의 <春望>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이었을 터이나, 상투성과 관습성을 피하기 위해 눌러두었을 것이다. 그에 앞서 동탁이 궁전에 불을 지르게 하는 대목에는 "仿佛楚人一炬"라는 평어를 달았는데,  이는 杜牧의 阿房宮賦」에 있는 구절 (“戍卒叫, 函谷擧 ; 楚人一炬, 可憐焦土. 嗚呼, 滅六國者, 六國也 ; 非秦也, 族秦者, 秦也, 非天下也.”)을 원용한 것이다. 시를 이용한 소설 비평이 나를 충동한다.

   6회에서 또한 공간 설정에 의아한 곳이 있다. 낙양을 떠나 장안을 향하던 동탁 일행이 滎陽에 도착하자 그곳 태수 徐榮이 영접하고, 동탁을 추격하던 조조가 이 일대에서 徐榮의 군대에게 크게 패해 목숨만 건져 돌아온다고 한 것은 이상하다. 滎陽은 낙양 동쪽, 지금의 鄭州에 가까운 고을이었기 때문이다. 虎牢關과 汜水關을 별개인 듯 서술한 부분도 본디 나관중의 착오였는데, 모종강이 미처 고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崤函之險이란, 장안 동남쪽의 천연 요새인 崤山과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만든 방어 시설인 函谷關을 의미한다. 동탁이 보낸 李傕으로부터 혼인 요청을 듣고 손견이 준열하게 꾸짖는 대목에 모종강은 "孫堅是漢子, 與呂布大異."라 평했는데, 이는 소설의 개작과 비평에 상당한 수준의 민족의식 또는 華夷觀이 작용하였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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