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람에 대하여
김창흡(1653~1722), 「명악록후서(溟嶽錄後序)」
무릇 사물은 쌓임이 있은 뒤라야 옮길 수 있다. 옮기되 갈 만한 곳이 있어야만 변화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늘에 드리운 대붕의 거대한 날개를 가벼운 바람이 질 수는 없고, 닷 섬들이 박을 됫말의 물로 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은, 쌓임이 먼저이고 옮김은 나중임을 말한 것이다. 붙어버리고 막혀버려 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광대함을 도모할 것인가?
내가 집중(集仲, 柳成運의 자, 1651~1710)에게 산과 바다에서 노닐 것을 권한 것이 여러 번이다. 집중은 내 권유에 부응하지 않고 깊이 숨어 살며 육예(六藝)를 가꾸는 것으로 일을 삼길래, 나는 꽉 막혀 답답한 지경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더욱 근심하였다. 이에 자주 먼 노닒으로 고무하였으나 집중의 응답이 미미하기는 전과 같았다. 나는 그가 노닐지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지난 가을에 내가 삼부연(三釜淵, 철원)에서 돌아오자 집중이 뒤따라 왔는데 콧바람이 흥겨운 것이 무엇을 얻은 듯했다. 내가 막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가 문득 말하였다.
“한계산(寒溪山)에 올라 상승폭(上乘瀑)에 다가가보고, 낙산(洛山)의 일출을 보았다네. 바다를 따라서 북쪽으로 사흘을 배로 가서 네 신선의 단서(丹書)를 보고 돌아다니다 영랑이 있던 봉우리(금강산)를 찾아갔지. 중향성(衆香城)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구룡담(九龍潭)도 구경하고는, 돌아오는 길에 자네 삼부연에도 들러 보았지.”
내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대의 노닒이 늦은 것인가? 아니다. 기다렸을 뿐이다.”
이윽고 그의 짐을 뒤져 이번 여행에 지은 유기(遊記)를 찾아 읽어보았는데, 처음에는 귀에 넘치더니 끝까지 읽었더니 근본을 찾음이 있고, 운명을 궁구한 것이 있었고, 풍자하여 우의한 것이 있었으며, 비판하며 꾸짖은 것도 있었으니, 말만 요란스레 펼친 것이 아니었다. 그 포괄하여 종합한 것은 만물의 제각각 특징을 거의 다했으니, 이 어찌 북돋아 쌓은 뒤에 크고 세차게 떨쳐 일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나아간다면 사방이 석연하게 이해되어 툭 트인 경지에 이를 터이니, 나는 장차 그 성취가 어디에서 그칠지 알지 못하겠다.
훌륭하도다, 집중의 한번 노닒에서 얻었음이여! 공자가 태산에 노닌 것은 높아서 비견할 만한 것이 없다. 이 아래로는 오직 태사공만이 잘 노닐어[善遊]세상에 특별하게 알려졌으니, 세상의 노닐기를 좋아하는 자제들이 자못 그를 사모하여 본받고자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스무 살에 노닐었던 사실은 알지만 그가 열 살에 옛글을 외웠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저의 빼어난 재주와 뛰어난 식견은 하늘이 낸 것인데, 여기에 널리 읽고 익혀 10년의 축적을 기다렸다. 쌓여서 옮겨갈 수 있은 뒤에 떨쳐 일어나 노닐었으니, 한번 보고 천하의 변화를 다 포착하고 흉중의 기이함을 토해내서 끝내 일가의 말을 이루었으니 후세에 전해짐이 무궁하게 되었다.
이처럼 노니는 일을 쉬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세상 사람들은 어려운 것으로 여기질 않으니, 노닌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저 미천하고 어리석은 사람들 중에도 하늘의 해가 빛나는 것은 알고, 또한 산수를 즐길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일찍이 산림이 우거진 곳에 이들을 두고 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흐르는가?”
“흐릅니다.”
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솟았는가?”
“솟았습니다.”
그러나 물 흐르는 소리가 무엇을 표상하며, 우뚝우뚝 솟아있는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물음이 미치면 모두 좌우를 돌아볼 뿐이었다. 새가 날고 물고기가 뛰면 그물을 쳐서 잡을 생각만 하고,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으면 베어서 팔 생각만 하였다. 요즘 노니는 이들은 대개 이와 비슷하니, 참으로 안에는 쌓인 것이 없으며 억지로 외물만을 좆는 것이다. 외물은 좆으매 사람 또한 외물이니 물건과 물건이 마주하면 어두울 따름이다. 어떻게 대관(大觀)의 즐거움을 취할 것인가? 그러나 신발을 끌고 쫓아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디에 무슨 산이 있는데 나는 가봤지, 어디에 무슨 물이 있는데 나는 놀아보았다네.”
이처럼 하고도 놀았다고 할 수 있는가? 비록 내가 놀았다고 해도, 이 정도로는 놀았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천하에 제대로 노니는 사람이 드무니, 나 또한 제대로 노닐지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일찍이 산과 바다에 몸을 맡긴 것은 집중보다 먼저며, 그 횟수 또한 두 번이나 많다. 높이 솟은 바위에 기대어 드넓은 물결을 바라보니 기분이 춤추는 듯하여 뜻에 꼭 맞았다. 하지만 돌아온 뒤의 모습이란, 싹이 더디 자란다고 그걸 뽑아놓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송나라 사람 꼴이니, 유람의 참다운 즐거움은 맛보지 못한 것이다. 내 일찍이 마음에 구하였지만 얻지 못했는데, 이제 집중의 글에서 깨달았노라.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인가? 쌓인 뒤에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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