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땐 뽕나무 밭이 있었다. 하지만 뽕나무는 대체로 방치된 채로 있었다. 나이롱 등 새로운 섬유가 대거 생산되면서 뽕나무를 길러야 하는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 나무는 우리에게 오디라는 열매를 선사했다. 어제 학회 회의 자리에서 우연히 김석회 교수님으로부터 어려서 체험한 누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화제의 계기는 지난 주 한문학회에서 발표된 연암의 <만조부인>) 전해에 누에에서 나온 나방 여러 마리를 잠실에 둔다. 깨끗한 종이를 깔아둔다. 알을 낳는다. 봄이면 애벌레가 태어난다. 뽕나무 잎은 따다 넣어준다. 누에가 뽕나무 먹는 소리. 실컷 먹고 몇 차례 잠을 자면서 고치를 만든다. 누에가 너무 자라면 오줌을 싸기 때문에 고치가 누래진다. 더 두면 나방이 된다. 그러기 전에 누에고치를 삶으면 고치는 명주실이 되고, 고치는 번데기가 된다. 그 중 일부는 나방이 되도록 둔다. 蠶室, 蠶食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나왔다.
뽕나무, 누에, 번데기, 명주, 비단, 옛날에는 일상 생활에서 매우 중요했지만 어느새 글자로만 남고 말았다. 문헌을 보다가 桑, 蠶, 紬, 이런 단어는 그저 까만 글자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런 것도 연상시키지 못하는. 이처럼 문자나 발음에서 생동하는 무엇인가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기계에 의한 판독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 고전문학에 나타난 뽕나무와 누에> 이런 논문을 쓰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나도 이 일련의 과정을 체험해보고 싶다. 옛 글을 보는 안목이 달라질 것이다. 뽕나무와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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