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상에서 원문 자료를 구하기가 힘들다. 부득이 논문 심청전 근원설화의 전반적 검토>(허원기)에 실린 부록과 구글에 올라와 있는 <韓國早期佛教遺存及其意義>(韓昇)에서 원문을 가져와 번역했다. 두 원문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원문을 대조한 것이 아니라서 오류의 가능성이 있지만, 차후 확인하기로 하고 아쉬운대로 올려둔다. 혹시 원본을 지닌 분의 질정을 바란다. 중국 절강성 舟山市 沈家門에 조성된 沈園에 관한 글 한 편을 원문 그대로 부기한다. 이 부분은 아무래도 행정상의 욕심으로 앞서 간 느낌이 있지만, 그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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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과현 성덕산의 관음사 사적 (1729)
玉果縣聖德山觀音寺事蹟
내가 젊었을 때 여러 산을 다니다가 운 좋게 관음사에 이르러 장로에게서 이 절의 거룩한 사적에 대해 들었다.
余少時遊歷諸山, 幸到觀音寺, 初聞長老之說聖蹟曰
충청도 대흥현에 한 장님이 있었는데 성은 元이고 이름은 良이었다. 일찍이 배우자를 잃고 홀아비로 가난하게 살았는데, 친척도 드물어 의지할 곳이 없었다.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洪莊이었다. 나면서부터 맑고 아름다워 태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성품은 막힘이 없고 총명하여 늘 지성으로 장님 애비를 봉양하였다. 정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으니, 밤낮으로 곁에서 모셨을 뿐 아니라, 의복이나 음식 하나하나 뜻에 맞지 않게 함이 없었다. 인근의 사람들이 모두 큰 효녀라고 일컬었으며,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忠清道大興縣有一盲人, 其姓元, 其名良, 早喪配偶, 鰥居窮困, 仍鮮族黨, 無所依賴, 惟有一女, 名洪莊, 生而淑美, 態度不凡, 性識通敏, 常以至誠勤養其盲父也. 志切反哺, 跬步不忘, 非特晨昏臥起左枝右梧而侍側, 亦衣服之需, 飲食之味, 無不稱旨. 一境咸稱其大孝, 名聞華夏焉.
하루는 장님 아비가 일이 있어 고을에 외출했다가 길에서 한 스님을 만났는데, 弘法寺 법당 건축의 책임을 맡은 性空이었다. 그는 문득 장님을 보자 달려와 엎드려 말했다. “그대와 함께 불후의 금강 불사 인연을 이루고자 합니다. 공께서는 저를 위해 크게 시주해주십시오.” 장님이 말했다. “나는 가난해서 빌어먹는 처지인데, 당신이 내게 큰 시주를 바란다니 어려운 일입니다.” 화주승은 다시 절하고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勸軸를 받던 날,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저에게, ‘내일 아침 길에 나서면 장님을 만날 텐데, 그가 바로 너의 큰 시주이니라.’라고 이르셨지요. 하여 간청 드리는 것입니다.” 장님은 한동안 곰곰 생각하다가 말했다. “집 안에는 한 말 쌀이 없고, 들에는 한 자 땅이 없으니, 하고 싶은들 어찌 하겠습니까? 다만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이 아이라도 드릴 테니 팔아 법당 지을 비용을 만드시렵니까.”
其盲父適有故, 出鄉邑, 路逢一僧, 乃弘法寺法堂干善稱名性空者也. 忽見盲者, 趨拜曰:“欲與君同成金剛不朽之因, 幸公為我大施也.” 盲者言:“以我貧丐, 求若所欲, 豈不難哉. ”化士再拜而起曰:“吾受勸軸之日, 夢有金人, 謂吾曰:‘明朝出路口, 必逢盲人, 即為汝之大檀越也. ’是以懇請.” 盲人籌思移時而言曰:“家無斗儲, 野無尺壤, 雖欲奚為. 止有一少女, 以此與之. 即賣而以為法堂經營之資.”
당시 소녀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화주승은 기뻐하며 인사하고 돌아갔다. 딸과 아비만 슬퍼한 것이 아니라, 산천도 색이 바래고 해와 달은 빛을 잃었다.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부짖었고, 도로에서 이 사연을 들은 이들 치고 가슴 저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딸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길을 가다가 몸과 마음이 지쳐 蘇浪浦 해안에 쉬었다. 머리를 들어 서쪽 멀리 바라보니 이윽고 푸른 바다 위로 두 척의 붉은 배가 다가오는데, 빠르기가 화살과 같았다. 포구에 정박했는데 중국 비단장사의 배였다.
是時女年二八. 化士欣然告別, 非但女與父痛悼不已, 山川變色, 日月無光, 禽獸亦哀號, 道路觀聽者, 無不痛楚於衷焉. 女跋涉道途, 心力疲困, 乃憩於蘇浪浦岸, 抬頭西望, 須臾碧海上兩紅船自西而東, 疾如飛箭, 來泊津頭, 是乃中州涓人之舡.
배 위에 있던 금관과 비단옷 차림에 옥패를 찬 사자가 이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일어나 그 앞에 절을 하면서 사례하였다. “참으로 황후마마십니다.” 소녀가 놀라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사자가 말했다. “우리는 晉나라 사람입니다. 永康 丁亥年(267년) 5월 辛酉일에 황후께서 붕어하셨습니다. 이로부터 황상의 슬픔이 그치지 않았는데, 하루는 꿈이 신인이 나타나 황상께 말씀하셨습니다. ‘새 황후는 동국에서 태어나 지금 장성하였는데, 단정하기가 예전 황후보다 나으니 더 이상 죽은 사람 때문에 슬퍼하지 마시오.’ 황상께서는 벌떡 일어나 깨어나셨습니다. 이튿날 바로 비단 4만 끝과 금은보화를 두 배에 가득 싣게 하시고, 사람의 얼굴을 잘 보고 지혜로운 자를 가려 사자로 삼고, 곧바로 동국으로 달려가 이러이러한 사람을 구해 오라고 단단히 이르셨습니다. 소신이 외람되이 이 임무를 띠고 명을 받자와 오면서 밤낮으로 근심이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 다행히 존안을 뵙게 뵈오니 이렇게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소녀가 탄식하며 말했다. “두 악기 소리가 서로 조응하니, 이 한 몸이 가고 말고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가져오신 폐백이 얼마나 되는지요?” 사자가 대답했다. “두 배에 금은보화가 가득 실려 있습니다.” 소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 몸은 저만의 몸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善根을 심기 위해 시주한 재화이오니, 두 배는 화주승에게 넘겨주십시오.” 드디어 날을 헤아려 함께 상국으로 들어갔다.
舡上金冠玉佩繡衣使者, 熟視此女之韶顔絕色, 即起拜謝於前曰:“真是后也. ”女變色曰:“是何言歟?”使者曰:“吾晉國人也, 永康丁亥五月辛酉, 皇后崩. 自是上常惻然不已. 一夜夢有神人白上:‘新皇后生於東國, 今已長成, 端正勝於前皇后, 更勿為逝者而哀也.’ 上欠伸而覺. 明日即備幣帛四萬端, 金銀珍寶, 都載兩舡. 又擇善相慧利者為使者. 申命直馳東國, 持此物色, 依樣求得. 小臣猥荷此任, 受命以來, 夙夜憂懼. 今幸睹威儀, 乃敢發言. ”女歎曰:“塤篪相應, 一身之去留, 何難之有. 蓋所持幣帛幾何?”使者答言:“滿載兩船珍寶. ”女微哂而言曰:“我身非我身, 乃父種善之奇貨, 兩舡都付化士. ”遂與計偕入上國.
조정에서 알현하는데 달덩이 같은 외모와 별빛 같은 눈이 눈부셨다. 황상이 지긋이 보더니 감탄하며 말했다. “바다 구석의 鰈域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니!” 이로부터 그녀를 총애하여 말만 하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朝謁之時, 月貌星眸, 光彩照人. 上視而歎曰:“以海隅之鰈域而有如是之人哉!”由是有寵, 所言皆從焉.
황후는 품성이 우아하고 선량하여 자비와 위엄이 하늘에까지 뻗쳤다. 淨業을 행하고 싶어 석공에게 명하여 瑪瑙로 탑 3천 기를 만들어 여러 나라에 나눠 주게 하였다. 그런 뒤 황후가 말했다. “보위에 올랐지만 본국을 어찌 잊을까!” 또 53佛과 5백 聖衆, 16나한을 조성하게 하였다. 하나하나 검사하고는 뱃사람으로 하여금 세 척의 石船에 실어 본국으로 보내게 했다. 바다에 띄운 배는 노를 젓지 않고 바람에 맡겨둔 대로 가서는 甘露寺 앞 포구에 닿았다. 이에 이 절에 봉안하고 돌아갔다.
后稟性雅善, 彌天慈威. 欲行淨業, 乃敕石匠, 以瑪瑙造塔三千, 分列諸國後. 后曰:“身雖登於寶位, 豈能忘乎本國. ”又敕成五十三佛、五百聖衆與十六羅漢. 點畢, 使舟人載三石船送本國. 浮海中流, 不施篙櫓, 風帆浪楫, 任其所之, 幸泊甘露寺前浦, 因安於此寺還了.
석공은 비록 늙었으나 신심과 원력이 크고 깊은지라 자기 아들로 하여금 탑을 만들게 하여 금강사에 옮겨 안치했고, 四度塔(?)은 옮겨 풍덕현 擎天寺에 세웠다. 황후는 평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풀고 싶어, “내 어찌 아버지의 福田에만 무심할 수있으랴!” 하고는 불상과 석탑을 만들어 옮겨 대흥현 홍법사에 안치하게 했다. 이와 같이 오가기를 다섯 차례나 kg면서 공덕이 원만해지고 바라던 일은 모두 이루어졌다.
石匠雖老, 志願弘深, 使其子, 又造塔, 移置金剛寺, 四度塔則運立於豐德縣擎天寺, 后又素願成就慕父曰:“爹之福田, 吾何獨無表?”精造佛與塔, 移安於大興縣弘法寺. 如是往復五度, 功德圓滿, 志願已畢.
다만 아쉬운 것은 자신의 願佛이었다. 이에 별궁을 청소하고 공인을 불러 관음보살 한 분을 조성하고는 ○人을 시켜 석선에 싣게 하여 동국으로 보냈다. 배가 떠나기에 앞서 황후는 단단히 일렀다. “이 불상은 배가 멈추는 곳에 봉안하도록 하라.” ○人은 명을 받고 동국으로 향하여 바다 위를 떠갔다. 기약한 날이 되자 어느 날 아침 홀연 樂安 地斷橋 가까이에 정박하였다. 얼마 안 있어 이 지역의 수졸이 荒唐船으로 의심하여 서둘러 따라 잡았다. 그러자 이 석선은 바람도 없는데 절로 움직여 먼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然所欠者, 自願佛也. 即掃別宮, 倩工鑄成觀音一尊, 令權人載石船, 送東國. 臨行, 后申命曰:“此像則隨所止處而奉安也. ”權人受命向東國, 漂流海中, 已及期矣. 一朝忽隨漂泊於樂安地斷橋側, 無何, 此土邊守疑是荒唐船也, 追捕甚急之. 會此石船無風自動, 入於渺茫中.
이튿날 聖德이라는 옥과 처녀가 뜬금없이 바닷가에 나타나 홀로 서서 멀리 바라보니,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아득한 곳에 작은 석선 한 척이 무슨 물건을 끌고 오는 듯하였다. 성덕이 조심스럽게 배 위에 올라 보니 황금 관음상이었다. 홀연 경외하는 마음이 일어 몸을 던져 절하고는 몸소 관음상을 업었었는데 가볍기가 기러기 털 같았다. 그런데 이 고개에 이르자 갑자기 태산처럼 무거워져 한 발짝도 옮길 수가 없었다. 이에 발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봉안하고는 이어 큰 절집을 세웠다. 편액에 ‘聖德山 觀音寺’라 한 데에는 이런 연유가 있다. 홍장과 성덕은 모두 관음보살께서 隨應하신 몸이었던가! 석가모니의 분신이 찰나에 백억일 뿐이겠는가!
翌日, 玉果處女, 稱名聖德氏, 無端自出海上, 獨立望遠, 天海雲波縹緲中, 一葉小石船, 如有引物而來前. 聖德奉覲船上, 金相觀音, 忽發敬心, 投體拜畢, 親負觀音, 輕如鴻毛, 行到此嶺, 重若泰山, 一步不移, 即休安置, 仍建大伽藍, 扁其額曰:“聖德山觀音寺”, 良有以也. 蓋弘莊與聖德, 俱是觀音隨應之身歟?豈特牟尼分身, 百億於塵剎耶!
그 당시 화주승 성공은 그렇게 얻은 재물로 한 달을 넘기기 전에 법당을 완공했다. 장님 원량은 그 전부터 딸과 헤어진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는데 문득 눈이 밝아져, 온갖 복을 누리고 95살에 죽었다. 이 모두 관음보살께서 감응하신 자취이니 사라져 버리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當時化士性空, 得其財, 不逾月斷功. 盲人元良, 從前別女之哀淚, 盲眼忽明, 俱享休福而終, 壽九十五. 此皆聖感冥應之蹟, 不可以泯沒者也.
내가 장로에게서 들은 것은 이게 전부이다. 사방에 솟아 뻗어가는 산세와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진 가람 터의 고요함 등에 대해서는 모두 생략한다. 옹정 기유년 늦봄, 碧梧 선사의 제자 白梅子가 優閑 스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중에서 번다한 곳은 덜어내고 소략한 부분은 채워 적었다. 다시 전후 중창의 사적을 기록하여 권미에 붙인다.
余所聞于長老者, 止此而已. 至若峰巒四圍之逶邐, 溪壑一帶之清冽, 人煙之敻絕, 洞府之幽闃, 來者目之, 可略也. 時雍正己酉暮春, 碧梧門人白梅子, 因優閑子之所述, 芟繁增刪而書之. 復記前後重創之蹟, 附之卷尾.
沈園이 舟山市 沈家門에 조성된 내력
沈院 在庭院深深中感受古典孝道(2009. 3. 17)
……
韓國對於沈清的研究,是一個非常龐雜的學術體系,就如同我國的“紅學”研究一樣,千頭萬緒,流派眾多。這裏不可能對此一一剖析,我們只需要知道,韓國學者在尋找沈清原型的過程中,在韓國的穀城郡玉果縣聖德山觀音寺發現了一處碑文《觀音寺事跡記》,講述的是這個觀音寺的緣起。
其中記載,有一個叫元洪莊的女子,其經曆大體與沈清傳說中的經曆相似,不同的是,元洪莊被化緣僧性空賣給晉國使臣,做了晉國皇後。洪莊一直不忘在故國的盲父,爲使父親重見光明,她請人制作了570尊觀音聖像送往韓國,聖德山觀音寺就是因元洪莊送來的佛像而建寺的。
韓國學者認定,元洪莊是沈清的原型這個說法是比較讓人信服的,也是現在沈清研究主流的論斷。上世紀90年代末,韓國學者在尋訪元洪莊遠嫁中國後的歸宿時,意外地來到了沈家門。他們認爲,這裏特殊的地理位置與興盛的佛教文化,和元洪莊有很大的聯系。
所以,以《沈清傳》爲媒介,自1999年1月起普陀區就與韓國穀城郡開展友好交往。2001年11月17日,普陀區與穀城郡簽署了《中華人民共和國浙江省舟山市普陀區與大韓民國全羅南道穀城郡建立友好交流關系協議書》。自此,我市學者與韓國學者開始聯合研究沈清的原型和身世。
“當時韓國人一直以爲元洪莊是做了晉國王後,但我在查找了我國大量經史後,並沒有發現這一記載。”王連勝說,“後來經過考證,我們這邊的研究人員提出了,元洪莊是賣給了做鐵和玉生意商人的,這個商人就是會稽國的沈國公,而當時的沈家門就屬於會稽國。沈國公的部下爲了安慰她的父親,虛說成了皇後。”
我方這一觀點有理有據,也符合當時的史實,得到了韓國學者的認同。而在我方的研究中,發現沈國公的家鄉可能就是在我市的沈家門,沈家門的得名也與沈國公有一定聯系,自然,沈家門也就成了沈清的“婆家”所在地。
爲了紀念沈清,發揚“孝道”,也爲了普陀區與穀城郡之間的友好交流及雙方在共同努力下得出沈清文化溯源的輝煌成果,有關部門投入800餘萬元,於2004年開始建造沈院,並於2006年建成。穀城郡也特意爲沈院的布展送來了不少有關沈清的展品。
我市的沈院是我國唯一一個紀念沈清的地方,也是國內罕有的紀念外國人的主題紀念館,成爲很多來我市旅遊、參觀的韓國友人的必到之處,爲中韓文化的交流作出了貢獻。
“一代代的儒家道德熏陶,構成了沈清故事孝的主題,祖祖輩輩的佛教信仰,使沈清故事帶有濃厚的佛教文化色彩。沈清既是杜撰的,又是真實的,她是千千萬萬個韓國少女的美好願望,也是一個典型人物。”王連勝說,“當時中韓之間有海上貿易,爲了航行平安,需要人身貢獻作爲祭物,於是許多韓國姑娘就成了人身買賣的對象。當然也有一些韓國少女被買來中國當丫環,還有一些美貌的女子被買來做了官員或富商的妻子,所以韓國人就希望自己的女兒像沈清一樣有好的命運,有孝敬的心思,沈清的故事才會出現,得以流傳。”
其實,我們在沈清傳說的背後,更多的是體會到中韓文化的一脈相承和中韓古代海上交流頻繁的曆史大背景。
同樣,我們更確信,舟山自古以來,就是一個浙東沿海一帶與東亞各國間開展經濟、文化交流的一個重要節點。另外兩晉時期,浙東地區佛教文化的蓬勃興起也爲兩地的友好交往創造了社會基礎。當時,一批大德高僧在此隱居,弘傳教義,他們在佛教文化的傳播和佛教寺院的興建方面作出了大量貢獻。
沈院的建造在此意義上絕對是一個明智之舉,沈院已成,對市民來說是一個不可多得的好去處,但對有關部門來說,其意味卻是深遠的。這意味著不能停止探尋的腳步,更需要在此基礎上,把文章做大,尋根我們自己的“孝”文化,發掘我市在古代中國沿海一帶的重要作用和深厚的海洋曆史底蘊。有些方面,我們確實需要學習別人的做法。
http://blog.sina.com.cn/s/blog_535d4d5d0100ce9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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