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스크랩]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검하객 2014. 9. 10.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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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 대지진(일본어: 関東大震災) 또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은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에 일본제국 사가미 만진앙지로 발생했던 큰 지진이다. 1855년에도 대지진이 있었으나 보통 간토 대지진은 이때를 말한다.

 

경과

 

간토 지진은 5분 간격으로 발생한 세 차례의 지진이다. 최초에 발생한 M 7.8[1]의 진원은 거의 동시에 11시 58분에 오다와라와 미우라 반도의 지하에서 약 15초 간 일어났다. 계속하여 M 7.3의 첫 번째 여진이 12시 1분에 일어나고, 두 번째 M 7.2의 여진이 12시 3분에 발생하였다. 이 세개의 지진은 모두 약 5분이상 계속되었다. 지진 후 간토 지역은 총체적인 혼란에 빠졌다. 정부 조직이 마비되었으며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시간은 11시 58분은 점심시간이 임박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날 도쿄를 비롯한 지진피해지역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였다.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과 요식업소에서 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지진이 발생하면서 불이 대부분 목재건물인 피해지역 건물들을 불태우며 널리 퍼져나간 것이다.

 

 

 

 

2차 피해

 

1923년 도쿄 일원의 간토 지방은 지진으로 인하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흉흉해진 민심 덕분에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고 보도내용에 의해 더욱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신문에 다시 실림으로서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 라는 헛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의 특징때문에 일본인들은 화재를 굉장히 두려워 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진위여부를 떠나 일본 민간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였다. 이에 곳곳에서 민간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불시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가차없이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였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하였으며,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한국어에 없는 어두유성음 및 종종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등으로 이루어진) 「十五円五十銭」(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을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이 때,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 출신)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는 등, 자경단의 광기는 상상을 초월할만큼 잔악했다.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끄집어 내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학살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오히려 조선인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야쿠자 등 비공권력 범죄 집단의 일부가 조선인을 숨겨주는 일이 있었다. 조선인 학살과 더불어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에 요주인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에 대한 학살 사건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치안 당국은 "조선인들이 폭동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하에 자경단의 난행을 수수방관하였고, 일부는 가담,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어, 그제서야 개입하였으나,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후였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되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 강아라카와 강은 시체의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축소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연행,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되었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는 그의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2534명으로, 김승학은 『한국독립운동사』에 피해자가 6066명이라고 적었지만, 그에 비해 당시 일본정부의 추산은 233명이었다.

 

피해

리히터 규모 7.9에서 8.4 사이로 추정되며 4 ~ 10분 정도 지속되었다. 도쿄 지역과 요코하마 지역, 지바 현, 가나가와 현, 시즈오카 현 등에서 10만 명에서 14만 2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7천 명이 실종되었다. 10만 9천여 채의 건물이 전부 파괴되고 10만 2천여 채는 반파 되었다.

 

복구

지진 이후 수도를 이전하자는 주장이 잠시 대두되었다. 히메지경성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복구를 하면서 현재의 도쿄의 기틀을 구성하는 도로와 철도 그리고 공원등이 계획되어 보다 근대적 모습으로 도시가 재건되었다. 특히 공원은 이후 있을지 모르는 대지진의 피난처 구실을 하게끔 만들어졌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다시 파괴되는 경험을 겪게 된다. 간토 대지진은 일본이 안전한 땅이 아니라는 인식을 일본인에게 영원히 심어 주었고 이러한 불안이 이후 적극적으로 중국을 침략 지배하겠다는 일본 제국주의를 키운 한 원인이 되었다.(한국은 이미 침략해 식민지를 만들었음으로 여기서 기술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일본의 안전 불감증의 심각함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정하였다.

 

 

 

 

출처 : 한류열풍 사랑 | 글쓴이 : 모두사랑해

 

 

이것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일본에서 일어난 한국인 집단 학살 사건 입니다

 

 

 

 

 

관동대학살. 가나가와 현 방면의 철길에 내버려진 일제에 작혹하게 학살된 한국인 시체들

 

일본 내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죄없는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죽인 관동대학살

 

 

 

 

 

일본인 화가 가야하라 하쿠도가 27세 때 관동대학살을 경험하고 그린 그림이다.

일본 경찰들과 민간인들이 조선인들을 단체로 학살하고 있는 장면.

 

 

 

(일본 경찰에 의해 조선인들이 연행되고 있다)

 

 


관동대학살은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함으로써

일본 사회가 극도로 혼란 스러워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일본정부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퍼뜨려

조선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일본정부는 지진으로 인한 혼란에 정신적 불안까지 겹치면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 보고

일본인들의 불만이 터져나올 것이라 생각,

따라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켜 우물에 독약을 넣고 부녀자를 강간한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려

일본인들의 위기의식을 조성한 후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가야하라 하쿠도가 그린 <동도대진재과안록>. 자경단이 조선인을 집단학살하는 장면.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1954년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 58년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감독상,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수상, 80년에는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 상을 수상하고 76년에는 일본 문화공로상을 수상한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이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그의 자서전 『구로자와 아키라』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얼마나 무모하고 잔인하게 조선인들을 죽였는가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일그러진 표정의 어른들이 <여기다! > <아니, 저기야! >하고 소리치면서 우왕좌왕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모습을, 나는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동네 우물들 중 한 곳의 물을 퍼 먹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이유인즉슨 그 우물 둘레에 쳐진 벽 위에 하얀 분필로 이상한 부호가 적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물에 독을 탔음을 표시하는 한국인 암호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추론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실은 그 부호라는 것이 바로 내가 휘갈겨 놓은 낙서였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행동이 이러하거늘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대체 인간이란 어떻게 된 존재인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9/7일자 이바라끼신문 외 언론들의 보도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유형이다.
『각처 우물에 독약을 넣고 이재민의 자녀에게 주는 빵 속에 독약을 뿌려서 준다고 하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어떤 촌은 조선인 일단의 습격으로 거의 전멸되었다. 그들은 계획을 세워놓고 미리 시기를 엿보고 있었던 것 같다』
『2천명이 팔을 끼고 다니며 부녀자 20~30명씩을 붙들어 놓고 강간한다.』


당시 일본에 살던 한국인들은 대부분이 노동자였고 그밖에는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었다.

노동자들은 일제의 토지 수탈정책에 의해 농토를 유린당하여 살기 어려워

일본에 건너와 헐값에 노동력을 팔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 바쁜 한국인들이 수천 명씩 무장하여

군대와 대결할 만큼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수많은 조선인 시체들이 길거리에 나뒹굴고 있다.. 일제의 토지정책으로 땅을 빼앗기고

일본으로 건너와 잘 살아보려 한 이들은 조국의 땅 한 번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낯선 타국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이로써 일본군부와 경찰, 우익세력은 “조선인은 모조리 죽여라”는 구호 아래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때리고 죽여 나갔다.

 

 

 

 

 

 

가메이(龜戶) 경찰서에서 일하고 있던 일본인 羅 丸 山
- "나는 조선 사람을 총과 칼로써 마구 쏘고 베어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다.

군인들이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더니 총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휘자는 총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공포감을 갖게 될 터이니 칼로 죽이라고 명령했다.

군인들은 일제히 칼을 빼 들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으며,

경찰서에서 9월 2일 밤과 3일 새벽 사이에 320여 명의 조선인을 학살한 것이다.

새벽 시체들은 화물자동차에 실려 어딘지 모르지만 운반되어 갔다."

 

 

 

 

 

 

 

 

◇ 불문학자 田邊貞之助
"4,5백 평에 가까운 공지에 반나체의 시체가 3백여 구 뒹굴고 있었다.

목이 잘려 기관지와 식도 등 경동맥이 꺼멓게 드러났고

뒤에서 목덜미가 베어져 벌겋게 살점이 드러난 것,

억지로 찢어 끊은 흔적이 역력한 잘린 머리는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더한 광경은 젊은 여자가 배가 잘린 채 죽어 넘어진 가운데

6,7개월 된 태아가 죽어 뒹굴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의 음부에는 쇠사슬과 죽창이 꽂혀 있었다.

내가 일본인이란 사실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조선인 시체를 확인하고 있는 자경단원. - 일본우익)

 

 

사이타마 혼죠경찰서의 경관이었던 아라이 겐지로

"어린이들은 일렬로 늘어서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목이 잘리고,

그 후 부모들은 책형에 처해졌다.

살아있는 조선인의 팔을 톱으로 자르는 일도 있었다.

할머니와 딸이 와서 내 아들은 도쿄에서 이 놈들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하며

시체의 눈알을 칼로 파내는 것을 봤다고 하였다."

 

 

 

 

 

 

 

 

 

 

 

(학살된 조선인들의 하의가 모두 벗겨져 있다.. 치욕적인 역사.. 이 피눈물 나는 역사를

왜 우리는 '선택과목'으로 배워야 하는가. 국가가 육체라면 역사는 곧 그 나라의 정신이다..

제 나라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정신 빠진 민족과 같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저들이 우리에게 한 짓을, 그리고 이 피눈물나는 역사를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 우리는

세계 그 어느 민족보다도 치열하게 공부하고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끌려갔던 우리 동포들은 탄광이나 막노동 등 같은 3D업종에 종사하며 일본의 바닥경제를 일으킨 주역들입니다. 그런한 경제 공로자들을 우대는 못할망정, 죽창과 쇠갈고리로 찔러 죽이고 찢어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다니 있을 법한 일입니까. 그래도 여태까지 사과 한마디 안 하고 있습니다. 제 나라 동포를 무자비하게 학살한 일본에게 따끔한 말 한마디 못하는 역대 우리 정부의 무능함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 아이들의 힘으로 만들어 가는 나라 김종수 목사

 

 

 

 

 

 

 

 

 

 

 

 

당시 ‘이재동포위문반’의 조사에 따르면 일주일 동안 관동지역에 살던 3만여 명의 한국인 중

생존자 약 7천여 명을 제외한 2만 2천여 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증거가 인멸된 후 사고조사에 나섰기에 6천 6백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얼마나 되는 인원이 학살되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죽임을 당해야 할 영문도 모른체 처참하게 죽어갔다.

도시 전체가 피비린내 나는 아비규환 인간도살 현장이었다.

 

 

 

 

 

 

 

 

 

일본정부는 책임을 자경단에 돌리고 자경단원을 형식상 재판에 회부했으나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석방하고 관동대학살을 '오인살해'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관동대학살은 정부의 치밀한 계획 하에 실시된 명백한 국가범죄이다.

 

 

 

“조선인 폭동설”을 정부가 조직적으로 유포시켰기 때문인데,

그 근거는 첫째, 일본의 공식적인 언론을 통해 소문이 퍼졌다는 점,

둘째, 통신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시점에서 소문이 불과 2,3일 만에 전국으로 유포되었다는 점,

셋째는 일본당국이 이와 관련한 진상조사를 철저히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인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한 작업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피해 당사자인 조선인들에게 학살의 원인 제공자로 누명을 씌웠다.

한편, 한국 정부는 해방 후 63년이 지나도록 일본 정부를 향해

재일동포의 인권유린과 학살에 대한 그 어떤 진상조사 요구도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런 일본을 돕겠다고

미국이 전국민적 성금모금을 하였고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일본을 정말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출처 : 숨겨진 한일역사 http://www.ko2ja.co.kr/index.asp

 

지구표면은 지표로부터 100km 내지 200km 정도의 위치에서 12개 정도로 구성된 단단한 암반층 판 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이 판들은 동쪽으로 움직이면서 판의 경계에 있는 지층들이 부딪히며서 지진이 발생한다. 실제로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큰 피해를 낸 나라들은 판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04년 12월 26일 쓰나미(Tsunami)를 동반한 대지진으로 23만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인도네시아가 그렇다. 특히 일본은 유라시아판과 태평양판 그리고 필리핀판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기 때문에 1995년 6천4백여 명의 사상자를 낸 고베 대지진까지 세계에서 지진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나라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58분. 그때까지 일본인이 경험하지 못했던 대재앙이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橫濱),가나가와(神奈川), 사이타마(埼玉)를 중심으로 한 관동(關東)지방을 강타하여 이 일대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상모만(相模彎) 해저를 진원지로 하는 진도 7.9의 지진이 발생했던 것이다. 땅이 갈라지고 집이 무너지는 등 도시 전체는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지진의 여파로 해안에서는 엄청나게 큰 해일이 일어났다.


철도. 도로. 전기. 수도 등 기관시설은 물론이고, 학교. 관청. 병원.주택 등 멀쩡한 건물을 찾아 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피해가 더욱 확산된 것은 목조건물 일색이었던 이 지역에 마침 점심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피워놓은 불이 대화재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대도시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하늘을 태울 듯한 큰 불은 20여 시간이나 계속됐다고 한다. 동양 제일을 자랑하던 도쿄는 4분의 3이 잿더미가 됐다.

특히 동경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 200여 명이 생화장 당했다. 지진을 피하여 육군피복공장(지금의 도쿄(東京) 스미다(墨田)구 요코아미초(橫網町)공원에 위치함)에 대피해 있던 주민 약 3만8천 명이 한꺼번에 타죽는 아비규환 생지옥이 발생하였다. 진재시방재조사회(震災市防災調査會) 보고서에 의하면 사상자가 약22만 명, 가옥 파손 46만 호에 달해 당시 피해금액이 약200억 엔(지금의 돈으로 수십조 원)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로써는 실로 세기의 대재앙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통신수단과 사회간접시설의 발달이 미흡했던 당시로써는 엄청난 사회혼란이 야기되어 심리적 공황 상태였던 것이다. 더욱이 당시 일본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연계되고 방송과 신문마저 중단되자 “후지산(富士山) 이 폭발했다”, “오가사하라 제도(小笠原諸島)가 바다 속에 잠겼다” 등의 근거 없는 흉흉한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퍼져나갔다고 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하여 공포와 혼란은 극에 달하였다. 시민들을 더욱 흥분 시킨 것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들이 시내 곳곳에 불을 질렀다”, “조선인들이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로 방화하려 하고 있다”는 등의 괴소문들이었다고 한다.

 

잔혹한 역사의 시작

역대 일본의 잔혹한 전쟁사 내면을 살펴보면 서기 762년 신라 침공 계획을 수립한 당시의 절대권력자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痲呂),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20세기 초 청일,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을 비롯한 3류 사무라이들은 천민 출신 또는 오랫동안 핍박 받아오던 하급 무사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절대권력을 움켜지자 그들의 약점과 국내의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민적 관심을 외부로 돌려 그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특히 메이지 쿠데타는 상대방을 생각하고 칼등을 쓰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같은 문과 무를 겸비한 1급 사무라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모술수와 무자비한 잔인함을 무기로 상대방을 제거하는 3류 사무라이인 이토오 히로부미와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와 같은 자가 정권을 찬탈하였다. 이는 근대 동아시아를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역사의 시작이었다던 것이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한반도로부터 조선통신사 외 기타의 방법으로 문물을 도입하여 일본의 근본을 형성하여 왔다. 그러나 정권을 찬탈한 이들 3류 사무라이들은 한반도보다 더 큰 서구사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들은 사냥꾼이 사냥개를 토사구팽하듯 메이지 쿠데타를 큰 획으로 하여 한반도와 철저히 단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종결 지쯤을 즈음하여 일본경제는 불황에 접어들어 실업자가 늘어갔다. 주가는 폭락하고, 생필품 가격은 폭등하는 나날이었다. 정부는 실업자들로 인한 사회불안의 원인을 일본에 체류해 있는 한국인 탓으로 돌려 왔었다. 일자리를 잃은 일본 노동자들은 한국인 노동자들을 “우리의 밥줄을 빼앗는 놈”들로 생각해 왔다. 여기에 농민들의 권익투쟁이 고조되고, 일본 공산당 창당, 사회주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었으며, 2.8독립선언. 3.1독립운동 등 한국인들과 일본의 대립 감정이 고조된 터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와병 중이던 가토 도모사브로(加藤友三郞) 수상이 사망하자 내각이 총사퇴 하면서 후임 총리로 군벌 출신인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가 지명되어 山本내각의 출현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새로운 내각이 아직 들어서지 않은 정권 무중력 상태에서 대지진이란 감당하기 힘든 재난이었다.

 

재난을 당한 사람은 100만에 이르렀고, 부모처자·형제자매는 뿔뿔이 헤어지게 되어 서로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부족하고 잘 곳도 없었다. 시민들은 왕궁앞 광장, 히비야(日比谷)공원, 우에노(上野)공원 등으로 피난하는 등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대혼란이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정부는 무엇보다도 지진으로 잿더미가 된 도시에서 식량난에 의한 민중폭동을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회 전반적인 여건은 한국인들을 속죄양으로 만들기에 적합하기까

▲화가 가야하라하쿠도(萱原白洞, 본명은 다케오(竹尾) 후에 黃丘로 개명)의 총 11.5m 관동대지진 묘사 두루마리그림 중 간판을 들고 부모친지를 찾는 사람들

지 한 환경이었다. 일본정부는 또 다시 재일 한국인들을 속죄양으로 삼는 길밖에 없어 보였다.


군중의 대혼란을 목격한 치안담당자 내무대신 미즈노 랜타로(水野連太郞),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츠시세(赤池濃), 내무성 경보국장 고도 후미오는 혼란을 틈타 한국인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해 혁명운동이라도 획책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현실화해 대학살 시나리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매한 민중들에게 진실을 외면하도록 하고, 악마의 피를 부르는 얄팍한 민족적 증오 감정을 자극해 정부를 향한 민중의 공격성을 조선인에게 돌리는 비열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라!

이들은 대혼란 속에서 군중의 불만과 분노가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의 책동과 연계하여 정부에 대한 폭동으로 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였다. 일본은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면 경찰력만으로 진압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결국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기로 했다. 그러나 군대 출동에는 계엄령 선포가 필요했다. 문제는 계엄령을 시행할 사유였다.
계엄령 제1조는 ‘계엄령은 전시 또는 사변에 임하여 병비로써 전국 또는 일부 지방을 경계하는 것을 법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즉 전쟁이나 내란(사변)이라는 조건이 없으면 계엄령은 발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대혼란은 지진과 화재에 의한 것으로 전쟁도 내란도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으로 3·1운동을 체험했고, 한국의 독립을 희구하는 한국 민중의 투쟁을 일본 지배층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내무대신 미즈노를 비롯한 이들 세 사람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조선인 폭동’이란 유언비어이다. 이들은 대혼란 속에서 민중들의 불만과 분노를 한국들에게 향하도록 하고 한국 독립을 위한 민중 투쟁을 사전에 막기 위하여 ‘조선인 폭동’이라는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여 우매한 군중의 분노를 조선인들에게 전위시킨 것이다.

이는 치안 최고 책임자 내무대신 미즈노 랜타로의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음 날 아침(9월 2일)이 되자……조선인 소동이 일어났다.……계엄령을 시행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일본정부 당사자가 유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계엄령은 조선인 폭동에 대처하기 위해서 시행했다고 미즈노 자신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정부 자작극인 유언비어를 유포하라!
일본정부는 ‘조선인들이 폭동과 방화.강간.강도.우물에 독을 넣는다’는 등의 각가지 유언비어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퍼뜨렸다.
지바(千葉)현 후나바(船橋)시 해군무선 송신소에서 내무성 경보국장 명의로 “도쿄 부근의 진재(震災)를 이용해서 조선인들이 각지에서 방화하고, 현재 도쿄 시내에서는 조선인들이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로 방화하려 하고 있으니, 각지에서는 충분히 주도면밀한 시찰과 조선인의 행동에 대한 엄밀한 단속을 실시하라”는 내용의 유언비어를 전국의 부(府)·현(縣)지사에게 통달을 하달했으며
관동 각 현에는 “재향군인회원. 소방수. 청년단원 등과 협력해서 조선인들을 경계하고, 일단 유사시에는 신속히 적당한 방법을 강구할 것”을 지시 했고
관하의 경시청 경관을 시켜 각 구·군·시·읍의 자치회, 재향군인회 등에 전달했다.

이렇게 유포된 유언비어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만 흐른 것은 아니었다. 파출소 앞에는 '조선인폭동'이라는 벽보가 내 걸리고 경찰은 제정신이 아닌 민중을 향해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유언비어를 인쇄물로 만들어 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군부 고위층인 제14단 참모장 井染大佐는 9월 7일자 ‘不野新聞’에 '이번 불령선인들의 행동의 이면에서 사회주의자와 소련의 과격파가 관련이 있다… 요컨대 이 3자의 3각 관계를 기초로 하여 되었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포고했다.

신문들도 뜬소문을 그대로 보도해 우매한 민중이 사실인 것처럼 믿게 하여 학살에 불을 지피며 한국인들에 대한 적대감정을 악화시켜 나갔다.
9/7일자 이바라끼신문 외 언론들의 보도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유형이다.
『…각처 우물에 독약을 넣고 이재민의 자녀에게 주는 빵 속에 독약을 뿌려서 준다고 하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어떤 村에는 조선인 일단의 습격으로 촌이 거의 전멸되었다. 그들은 계획을 세워놓고 미리 시기를 엿보고 있었던 것 같다. 시내의 중요한 건물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전부터 화살표 위에 두 줄기 불빛 같은 표를 찍어둔 듯하다』
『2천명이 팔을 끼고 다니며 부녀자 20~30명씩을 붙들어 놓고 강간한다.』
『총살된 선인들은 폭탄 휴대자들이다 』
『붉은 천을 팔에 감은 자는 폭탄 가진 자요, 노란빛은 독약 탄 자이다』

당시 일본에 살던 한국인들은 대부분이 노동자였고 그밖에는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었다. 노동자들은 일제의 토지 수탈정책에 의해 농토를 유린당하여 살기 어려워 일본에 건너와 헐값에 노동력을 팔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학생들도 어려운 고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 바쁜 한국인들이 수천 명씩 무장하여 군대와 대결할 만큼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당시 퍼뜨린 유언비어가 지진 발생 두 세 시간 만에 시시각각으로 재빠르게 퍼져나간 데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부 관리들의 조직적인 유포 내지는 방조가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유언비어는 지진 발생 세 시간 만인 오후 3시경부터 나돌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경과에 따라 리얼해져 갔다. 9월 1일부터 3일 사이 조선인을 학살하기 위한 각종 유언비어를 시간대별로 기록한 일본경시청의 『大正大震火災語』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9월 1일
(오후 3시) 사회주의자와 선인의 방화가 많다
9월 2일
(오전 10시) 불령선인(不逞鮮人-불량한 조선인을 뜻함)들의 내습이 있을 것이다. 9월 1일 화재는 다수의 불령선인들이 방화 또는 폭탄을 던져서 일어난 것이다
(오후 2시) 그들은 단결하여 도처에서 약탈을 감행하며 부녀를 능욕하고 잔존 건물에 불을 질러 파괴하는 등 폭동이 심하여 전시(全市)의 청년단, 재향군인단 등은 현(縣) 경찰부와 협력하여 이를 방지코자 노력하고 있다.
(오후 2시) 요코하마 방면에서 내습하는 선인의 수는 약 2천 명으로, 총포. 도검 등을 휴대하고 이미 오오고(大鄕)의 철교를 건넜다. 군대는 기관총을 비치하고, 선인의 입경을 차단시키고자 하며, 재향군인 청년단원 등도 출동하여 군대를 응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군대를 失口 방면으로 향하고 있다.
(오후 4시) 原田町을 습격한 2백여 명은 다시 相原·片倉의 두 마을에 침입, 농가에 들어가서 물건을 빼앗고 부녀를 살해했다
(오후 4시) 선인들이 鶴見 방면에서 부녀자를 살해했다
(오후 5시) 선인 1백10명이 寺島에서 관내 四木橋 부근에 모여 흉기를 휘두르며 폭행을 하고 방화도 한다. 선인들이 기회만 있으면 폭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하였는데, 진재가 돌발함에 따라 예정계획을 변경하여 미리 준비했던 폭탄과 독약을 유용하여 제도(帝都) 전멸을 꾀하고 있으므로 우물물을 마시거나 과자를 먹는 것은 위험하다.
9월 3일
(오전 1시)
선인 약 2백 명이 本鄕·向島 방면으로부터 대일본방적㈜와 隅田역을 습격했다
(오전 4시) 선인 수백 명이 本鄕·湯島 방면으로부터 上野공원에 내습한 모양이니 속히 谷中 방면으로 피난하라. 짐 가지고 갈 필요는 없다
(오전 10시) 군대 약 30명이 선인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月島에 갔다
(오후 3시) 선인들이 경찰서에서 석방되었으니 속히 이들을 잡아 죽여버려라.
(오후 6시) 선인이 시내 우물에 독약을 투입했다.
(오후 9시) 上野공원과 불타버린 곳에는 경찰관으로 변장한 선인이 있으니 주의하라.

이렇듯 당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푼다', '방화 강도 강간을 벌인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등 이런 유언비어들은 일본인의 민심을 크게 동요시켜 진재의 공황 속에서 한국인은 일본민중의 공동의 적이 되었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日변호사聯보고서에서도 확인되었던 것과 같이 일본정부가 의도적으로 퍼뜨렸다는 증거가 확실하므로 그것은 유언비어가 아니라 일본이 책임회피를 위한 또 하나의 역사조작이요, ‘한국인을 살해하라는 암호’였다.

조선인을 학살하라!

일본정부는‘남자는 무장하고 여자는 피하라. 조선인을 보면 타격해도 무방하며 살해해도 관계없다'며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 이리하여 순식간에 전직 군인과 젊은이들로 구성된 자경단(自警團)이 도쿄 1,593개, 가나가와현 603, 사이타마현 300, 치바현 366, 이바라키현 336, 군마현 469, 기타 16개, 합계 3,689개의 자경단이 조직됐다고 한다. 길거리에는 검문소가 설치되어 군대·경찰·자경단에 의한 인간사냥, 한국인 대학살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총.칼.톱. 곤봉. 몽둥이. 죽창으로 무장한 이들의 외침은 "조선 놈이면 다 죽여버려라"는 것이었다.
▲화가 가야하라하쿠도(萱原白洞, 본명은 다케오(竹尾) 후에 黃丘로 개명)의 총 11.5m 관동대지진 묘사 두루마리그림 중 칼과 죽창 곤봉을 든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장면

‘내 부모 내 자식과 아내를 죽인 것은 다 조선 놈들이다. 내 집을 부수고 우리를 기아의 지경에 몰아넣은 것도 그놈들 때문이다’. ‘죽여라 쳐버려라’ 외치며 자행된 학살은 박살, 사살, 교살 등 갖은 악랄한 방법으로 한국인 살해가 저질러졌다. 일본 내무성에서 지방에 내려 보낸 ‘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 단속’ 공문이 군대와 경찰까지 동원돼 학살에 기름을 붓은 격이 되었다.

당시 ‘이재동포위문반’의 조사에 따르면 일주일 동안 관동지역에 살던 3만여 명의 한국인 중 생존자 약 7천여 명을 제외한 2만 2천여 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증거가 인멸된 후 사고조사에 나섰기에 6천 6백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밝혀쪘다. 하지만 얼마나 되는 인원이 학살되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죽임을 당해야 할 영문도 모른체 처참하게 죽어갔다. 도시 전체가 피비린내 나는 아비규환 인간도살 현장이었다.

쯔보이 시게하루라는 한 일본인 여류작가는 관동대지진 당시 한인에 대한 색출과 학살 현장의 살벌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경찰.군인.자경단 등은 버스.열차 안 혹은 길거리에서 승객들에게 “15엔(円) 15전(錢)”, “ぱぴぷぺぽ (빠삐뿌뻬뽀)”등과 같은 어려운 일본말을 발음하게 하거나 ‘교육칙어’를 암송하도록 해 발음이 이상하면 한국인으로 단정하고 칼과 몽둥이,죽창으로 마구 찔러 처참하게 살해하여 강물에 던지거나 불에 태웠다고 한다. 일본 관헌들은 일인들에게 머리에 흰띠를 두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 방법만으로 구분이 어려워지자 ‘아이우에오’로 시작되는 일본 '가나'를 전부 외워보라든가, '링고(사과)'를 발음해 보라, 심지어는 역대 일본 일왕의 이름을 대라 하여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한국인으로 단정했다고 한다. 한인을 골라내기 위한 수단은 천인 천 가지였다. 다분히 주관적이며 명확한 근거가 없었다. 군중 심리에 좌우되어

누군가 ‘조선인이다’라는 한 마디만 하면 와! 하면서 개떼처럼 달라 들어 처참하게 죽였다. 이들은 이성을 가진 집단.국가가 아니라 저능한 동물집단이나 할 짓을 저질렀다. 붙잡힌 사람은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고 몰매를 맞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와 함께 중국인 폭동설도 유포되면서 중국인도 수백 명 학살됐다고 한다. 피의 악마에 물든 일본인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총칼 등으로 닥치는 대로 한국사람을 죽여 강물에 던지거나 불에 태웠다고 한다. 학살 방법은 잔인함의 극치였다. 피에 굶 줄인 악령들의 축제를 일본국가가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 요코하마(橫濱) 근처에는 속칭 “根岸별장” 이라 불리는 요코하마 형무소가 있었다. 지진으로 형무소의 콘크리트 벽이 파손되어 도망쳐 나온 죄수들이 7,8백 명 되었다. 이들도 한인을 잡는 수사대에 합세하는 참으로 귀가 막히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들은 동네를 이 잡듯이 뒤지며 한국인을 철야로 사냥하여 살해했다. 한인 시체는 쿠라모토다리(倉本橋) 제방 가에 줄지어 선 벚꽃나무 가지에 매달았다. 살아있는 사람은 매달아 놓고 린치를 가했고, 죽은 사람은 매단 줄을 끊어 시체를 물 속에 빠뜨렸다. 하천은 몇백 명의 시체가 쌓여 붉게 물들어갔다. 마을 수색대에 의한 참극은 5일이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살기에 찬 이들 자경단원들은 한국인을 거리나 집안에서 찾아내 죽이는데 그치지 않았다. 유치장에 일시 보호되어 있는 사람들까지 학살했다.

군마현(群馬縣) 경찰서 토건업체인 까시마구미(鹿島祖)가 고용하고 있던 한국인 14명을 회사측 요청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문을 들은 자경단대표가 경찰서로 달려와 한인들을 넘겨달라고 아우성이었다. 4,5명의 경찰관들은 서장이 오면 결정하자고 했지만 군중들은 당장 넘기라고 우겼다. 결국 자경단원과 2백여 군중이 몰려와 소동을 벌이다가 14명의 한국인을 전부 살해했다.

기거정(奇居町) 경찰서 유치장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10여 명이 살해되었다. 9월 4일 요코하마 네기쪼(根岸町)에서 자경단에 붙잡힌 한 한국인은 몸에 지니고 있던 감기약을 독약으로 오인 받아 파출소 옆에 동여 매인 채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가메이도(龜戶)경찰서에서 벌어진 사건은 학살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한인학살은 자경단이나 경찰에 의해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었다. 계엄령 미명 아래 동경시내에 진주해 들어온 군대도 가세했음이 여러 증언자들이 밝히고 있다. 도쿄지역에 치안유지를 위하여 배치된 군인들은 가메이도경찰서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총칼로 한인들을 밤 세워 죽이기 시작했다. 피에 굶 줄인 군인들은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다. 그 비명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고, 일대의 강아지들은 참혹함의 극치에 미동조차 하지 못하였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처참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서만 하룻밤 사이에 320여 명에 이르는 한인이 학살됐다. 경찰서 구내에서 벌어진 이러한 학살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경찰이 강력히 이를 제지하지 않고 사실상 묵인, 방조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은 인간이기를 거부한 뼈아픈 사건이다. 천재(天災)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학살이라는 천인공노할 인재(人災)였다. 1923년 9월 1일 바로 이날은 “한국인 대학살의 날”이다.

대학살 관련 증언 사례

◇ 保坂祐二 세종대 교수
호소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할머니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들을 너무 심하게 괴롭혔어. 아무 죄도 없는 조선인의 머리에 못을 박아 죽이는 장면을 바로 눈 앞에서 봤으니까"

◇ 일본인 越中谷利一
진재 당시 나라시노(習志野)기병대의 견습사관으로 계엄령 선포 직후 동경에 진주했던 越中谷利一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열차 안에는 피난민들이 석탄 위까지 파리떼처럼 빽빽이 앉아 있었는데, 그 가운데 있는 조선인들을 모조리 끌어내렸다. 그러더니 칼과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일본인 피난민은 폭풍우같이 "와" 하는 만세소리와 함께 국적(國賊) 조선인을 다 죽여버리자."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 일본인 羅 丸 山
가메이(龜戶) 경찰서에서 일하고 있던 羅丸山은 "나는 조선 사람을 총과 칼로써 마구 쏘고 베어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다. 군인들이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더니 총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휘자는 총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공포감을 갖게 될 터이니 칼로 죽이라고 명령했다. 군인들은 일제히 칼을 빼 들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으며, 경찰서에서 9월 2일 밤과 3일 새벽 사이에 320여 명의 조선인을 학살한 것이다. 새벽 시체들은 화물자동차에 실려 어딘지 모르지만 운반되어 갔다."고 회고했다.

◇ 일본인 八島京一
9월 4일 일찍 龜戶경찰서 순사 3,4명이 짐차에 석유와 장작을 싣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八島京一과 잘 아는 淸一이란 순경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죽은 사람들을 태우러 가는 거야.”라고 해 "죽은 사람들?"했더니 "어제는 밤을 새워가며 죽였는데 32명이나 되었어. 외국 사람들이 서에 온다니까 급히 태워버리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 철도 기관사 平田鐵
철도기관사인 平田鐵씨는 스미다가와(隅田川)의 永代橋 아래에서 한인 시체 1천 2백여 구를 보았다고 전했다.

◇ 불문학자 田邊貞之助
대지진의 불바다에 이어 관동 일대는 조선인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동경을 가로지른 아라가와(荒川), 스미다가와(隅田川) 두 강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4,5백 평에 가까운 공지에 반나체의 시체가 3백여 구 뒹굴고 있었다. 목이 잘려 기관지와 식도 등 경동맥이 꺼멓게 드러났고 뒤에서 목덜미가 베어져 벌겋게 살점이 드러난 것, 억지로 찢어 끊은 흔적이 역력한 잘린 머리는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더한 광경은 젊은 여자가 배가 잘린 채 죽어 넘어진 가운데 6,7개월 된 태아가 죽어 뒹굴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의 음부에는 쇠사슬과 죽창이 꽂혀 있었다. 내가 일본인이란 사실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 경찰관 아라이 겐지로
당시 사이타마 혼죠경찰서의 경관이었던 아라이 겐지로는 어린이들은 일렬로 늘어서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목이 잘리고, 그 후 부모들은 책형에 처해졌다. 살아있는 조선인의 팔을 톱으로 자르는 일도 있었다. 할머니와 딸이 와서 “내 아들은 도쿄에서 이 놈들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하며 “시체의 눈알을 칼로 파내는 것을 봤다" 라고 증언하고 있다.

◇ 구로자와 아끼라(黑澤明) 영화감독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진재 당시 유언비어의 허구성과 조선인 학살의 무모함을 그의 자서전 <구로자와 아키라>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일그러진 표정의 어른들이 “여기다!” “아니, 저기야!”하고 소리치면서 이리저리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모습을, 나는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들은 수염이 난 한 사내를 쫓고 있었는데 얼굴에 그렇게 털이 많이 난 사람이 일본인일 리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우리가족도 우에노지역 근처의 화재 때문에 집을 잃은 친척들을 찾으러 나섰다. 그런데 아버지가 수염을 길게 길렀다는 이유만으로 몽둥이를 든 무리들이 아버지를 에워쌌다. 나는 방망이질치기 시작하는 가슴으로 아버지와, 함께 서 있는 형을 쳐다보았다. 형은 조소하는 듯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순간 열화 같은 아버지의 호통이 떨어졌다. “바보 자식들!” 그러자 그들은 순순히 흩어져 사라졌다.

우리 동네에서는 각 집마다 한 사람씩 보초를 내도록 했다. 하지만 형은 이 모든 생각에 비웃음을 보낼 뿐 아예 순번을 맡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할 수없이 내가 죽검을 들고 나갔더니, 고양이 한 마리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하수관에 나를 배치해 주었다. 그들은 거기에 나를 배치하며 “한국인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숨을 지도 몰라” 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욱 우스운 일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동네 우물들 중 한 곳의 물을 퍼 먹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이유인즉슨 그 우물 둘레에 쳐진 벽 위에 하얀 분필로 이상한 부호가 적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물에 독을 탔음을 표시하는 한국인 암호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추론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실은 그 부호라는 것이 바로 내가 휘갈겨 놓은 낙서였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행동이 이러 하거늘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대체 인간이란 어떻게 된 존재인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부흥기념관(復興記念館)
일본 도쿄(東京) 스미다(墨田)구 요코아미초(橫網町)공원 안에는 復興記念館이 있다. 이곳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사망자 58천여 구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이곳 위령당에는 "1923년 9월 간도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잘못된 책동과 유언비어로 6천여 명의 조선인이 귀중한 생명을 빼앗겼습니다. 마음속 깊이 추도합니다." 라고 시작하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일조(日朝)협회 회원들이 73년 세운 것이다. 이곳 관계자는 “이 공원 인근 강에선 지진으로 다리가 무너졌는데 군인들이 조선인들을 그곳으로 끌고가 학살한 후 강에 버렸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공원자료관 2층에는 관동대지진 이후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그린 그림이 전시돼 있다. 몽둥이를 든 자경단원들이 도깨비 같은 모습으로 한인을 검문하고 때리는 장면이 있으며, 그림 옆에는 여러 권의 원고지 뭉치가 있다. 당시 학생들이 남긴 작문에는 “길에서 조선인 살해 등 글로 다 쓸 수 없는 비참한 장면을 보았다”는 등의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당시 일본 학생들이 쓴 ‘대지진 조난기’에는 거의 모든 작문 속에서 한국인 학살 목격담이 몇 대목씩 꼭 기록되어 있다. 지진이라는 무서운 자연재해 속에서도 어린 학생들에게 한국인 학살이 얼마나 충격으로 비쳤나를 알 수 있다. 이 작문은 도쿄을 비롯한 가나가와(神奈川), 사이타마(琦玉) 등 관동지방 소학생(초등학생)을 비롯한 학생들이 쓴 것으로, 오랫동안 도서관 창고 속에만 간직되어 일반공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대지진의 참화 속에 재일 한국인들이 당한 참상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소학교 4년 男) 조선인이 냇가와 우물에 독을 넣었다고 해 걱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물이어서 그 물을 퍼 마시고 밥을 짓고 했다. 그 뒤 조선인들을 10명쯤 보았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소학교 5년 女) 3일 아침 피난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파출소 앞을 지날 때 "죽여 죽여"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조선인이 나쁜 짓을 해 붙잡혔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자부(麻市)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곳곳에 비상선을 치고 조선인으로 보이면 모두 붙잡아 버렸다.
(소학교 5년 男)…가는 도중 새까맣게 탄 시체, 물에 떠 있는 시체, 조선인을 죽이고 있는 곳…글로 다 쓸 수 없는 비참한 장면을 보았다. 그날 한밤중 "저기 조선인이다"라는 소리와 함께 두 발의 권총소리가 들렸다.
(고등과 1년 女) "불이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조선인 15명이 권총을 들고 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날 밤은 아무도 잠을 자지 못했다. 불을 피우고 망을 보았다. 끝내 선인은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 조선인이 학살됐다는 얘기가 있어 친구와 함께 보러 갔다. 가보니 길가에 두 명이 죽어 넘어져 있었다. 일동은 만세를 불렀다 .
(고등학교 2년 男)…시각은 정각 11시였다. 씩씩한 나팔소리와 함께 땡땡 경종이 난타 되었다. 잠시 후 "조선인들이 권총 등을 가지고 쳐들어오니 모두 분투하라"는 소리와 함께 총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나는 마음속에 '결사'라고 되새겼다. 그러나 조선인이 오는 모습은 없고 나팔소리도 잠잠해져 적막이 흐를 뿐. 비로소 유언비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공포의 밤이 밝았다. 백명 쯤 되는 조선인이 포박되어 열 댓 명의 군인들에게 호송되었다. 지난밤의 총소리는 이들 선인들을 잡기 위한 공포였다.

이상과 같은 작문에는 한국인들이 나쁜 짓을 했다는 묘사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조선인들이…했다더라?’ 조선인들이 권총을 들고 쳐들어 온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등 간접 전언(傳言)이거나 소문을 기록한 것뿐이다. 그 반대로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참살하거나, 한국인이 당한 참상은 직접 눈으로 본 장면을 그대로 표현한 것들이다.

진상 조사 활동

일본정부가 학살을 조장했다
9월 5일을 기점으로 학살은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유언비어의 실체가 하나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너무도 많은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에 학살의 대상이 없어져 소강상태에 빠졌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일본 소방대본부는 9월 6일 동경 日日新聞을 통해 다음과 같은 발표를 했다.
“소방대가 불을 끈 곳은 23개소가 되지만 방화는 한 곳도 없었다. 또 조선인들이 폭탄을 투척할 장소에 분필로 표시해 두었다고 했는데, 나중에 조사해 보니 이는 청소회사 인부, 신문배달부, 우유배달부들이 그들의 편리를 위해 표시해 둔 것이었다.”

이 기사 가운데는 유아사(湯淺) 경시총감의 말도 인용되어 있다. "이재민들이 불안한 상황 속에서 조선인 폭행 소문이 나돌자 미친 사람처럼 흥분했던 것은 사실이다. 한 가지 예로 조선인이 폭탄을 가지고 다닌다 하여 붙들어 조사해 보니 사과였다. 또 한 민가 주부가 솜을 초에 적셔 세면기에 담가둔 것을 청년 자경단들이 보고 방화용 석유로 오인, 그 주부에게 조선 사람에게 가담한 사람이라 힐문한 실례도 있다."
그 외 유언비어의 허위성을 밝혀낸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한편 한국인 대학살 태풍이 휘몰아 친 이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국인만 죽였더라면 우물쭈물 거짓말하여 넘어 갔겠지만, 한국인과 얼굴 모양이 비슷한일본사람도 상당 수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한국사람인 줄 알고 죽이긴 했으나 살인은 살인이고 보니 재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살인 동기가 나오게 되었다. 자연 당국의 지시와 선전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정부 당국은 궁지에 몰린 것이다.

살해 문제가 대두되면서 그 만행을 저지른 자경단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경찰은 이들의 검거를 묵인함으로써 책임을 자경단에게 전가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허나 이 같은 태도에 분노한 자경단 연맹은 궐기했다. 결의문을 발표하며 자경단의 만행 원인을 '정복한 관헌'들이 조장했음을 폭로했다. “조선인을 볼 때에는 살해.타격해도 관계없다. 그들은 흉기를 휴대하고 도처에서 살인, 강도, 능욕, 방화 등 모든 악행을 하고 있다고 선전한 자는 누구인가. 당국은 이를 요코하마에서 강도질한 모모 등이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직접 우리에게 전달한 자는 바로 정복 경찰관리였다. 유언비어의 출처에 관하여 당국이 그 책임을 지지 않고 민중에 전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외쳤다.
결의문은
1. 유언비어 출처를 당국이 책임지지 않고 민중에게 전가하려는 것,
1. 필요할 때 자경단의 폭행을 방치하고 있다가 지금 와서 그 죄를 묻는 이유,
1. 자경단원의 폭행만 문제 삼고 허다한 경관의 폭행은 비밀에 붙이는 것 등에 대해 힐난하고 있다.

학계에서도 '경찰 관헌의 분명한 대답을 구함'이라는 글을 게재해 공개 추궁을 하였다. 법학박사 우에스기 신키치(上杉愼吉)은 시민의 의혹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유언비어의 전파는 경찰이 자동차 포스터, 말 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전케 하여 퍼뜨리고서 사태가 이렇게 되자, 시민의 목격을 무시하고 관헌이 한 것이 아니라는 책임회피
▲폭동의 진압을 못한 책임
▲인민을 함부로 살상해 태워버린 가메이도(龜戶) 사건에서도 경찰과 군대의 폭행은 알려져 있는데 책임회피를 하는 점
▲헌병이 무정부주의자 오오스기(大杉)와 그의 처, 어린이 3명을 죽인 사건에 대한 책임 등이다.

일본정부의 방해공작
한국에는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각 경찰서를 통해 이와 같은 움직임을 엄격히 감시하였다. 동아.조선 등 언론이 학살 진상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를 강화했다. 9월 5일 재경 일본 유학생들은 유학생 생사확인을 위한 집회를 가졌다. 재일동포 친족회는 실태조사를 결의하는 대회도 열었다. 민심의 동요를 우려한 경찰 당국은 경계와 단속을 강화해 나갔다. 9월 7일에야 비로소 유언비어 단속을 공포했다. 이로써 9•10월 두 달 동안에 불온언동으로 단속된 사람이 1천 3백 17명, 법규 위반으로 검거된 자는 122명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에서 학살에 대한 동요나 문책론이 등장하자 일본은 무마책의 일환으로 시급히 '조선인을 함부로 폭행하지 말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조선인 수용소를 설치하는 등 생존자 구조에 나섰다고 한다. 나라시노(習志野), 目墨경마장, 相愛會, 총독부 유학생 감독부 등에 한국인 약 7천 5백 명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진상을 조사하려는 자유법조단 등의 단체 활동을 오히려 방해했다.

일본정부의 책임회피
한국인의 무고한 학살이 명백해진 이상 최소한 피살자 수. 군인. 경찰. 자경단 중 학살범은 누구인지, 살해 방법. 살해자 처벌. 피살자 보상 문제 등을 명백히 밝혀야 했다. 진재의 혼란 상황에서 숫자 파악이 어려웠겠지만 일본정부는 자신들은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용했었다며 학살자 조사에 나서지 않았다. 나중에 한국인 학살이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마지못해 수백 명 선이라고 얼버무렸다. 일본정부는 끝까지 이 문제에 대하여 조사를 거부하고 국가이기를 포기했다.

그러나 그해 9월 말 동경에 있던 조선기독교 청년회, 천도교 청년회, 北星會 등 각 단체 유지들이 발기해 20여 명으로 구성된 '이재동포위문반'은 피살자 수를 5천 명 선으로 추산했다. 이재동포위문반은 당시 도쿄와 요코하마에 약 3만 명의 한인들이 살았는데 진재 직후 각처에 수용된 생존자 7천 580명을 제외한 2만 2천 420명이 희생자로 추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시체로써 확인할 수가 없었기에 실종자 2만 2천 420명 가운데 1/4 정도로 줄잡아 5천명 이란 숫자가 나온 것이라 한다. 일본정부의 비협조로 조사상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같은 해 12월 독립신문사 김승학 특파원을 비롯한 한국인 유학생 등에 의한 자체조사에서는 6천 6백 61명으로 밝혔고, 이를 12월 독립신문에 발표했다.

日변호사聯보고서
일본 변호사연합회는 2003년 8월 25일 진재 당시의 일본정부 자료와 형사재판 기록 등을 토대로 한국인 학살을 유발한 유언비어가 일본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유포됐다는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관동대지진 80년 만에 일본의 공공단체가 처음으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연합회는 일본정부가 유발한 책임이 있다면서 고이즈미 총리에게 사죄와 진상규명을 권고했다.

일본 변호사연합회 조사보고서에는 “9월 2일 오후 3시 자경단원이 ‘폭탄과 독약을 소지하고 있다’며 경찰서로 끌고 온 조선인이 갖고 있던 것은 설탕이었다.” 라고 밝힌 지진 발생 다음날 취임한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당시 일본총리의 글과 “진상을 알 수 없는 피난자들의 지나친 정보”라고 적고 있는 당시 군 문서도 포함하고 있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 학살을 유발한 유언비어는 당시 경찰이나 군 기록에도 허무맹랑한 유언비어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관되게 기술돼 있다.

그러나 일본변호사연합회 조사보고서는 한국인 학살의 근원이 되었던 유언비어의 진원지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지진이 일어 난 후 지바현 후나바시(船橋) 해군송신소에서 내무성 경보국장 명의로 전국의 부(府)·현(縣)지사에게 보낸 “도쿄 부근의 진재(震災)를 이용해서 조선인들이 각지에서 방화하고, 현재 도쿄 시내에서는 조선인들이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로 방화하려 하고 있으니, 각지에서는 충분히 주도면밀한 시찰과 조선인의 행동에 대한 엄밀한 단속을 실시하라”는 전문과 내무성이 사이타마(埼玉)현 등 도쿄 인근의 현에 대해 “재향군인회원, 소방수, 청년단원 등과 협력해서 조선인들을 경계하고, 일단 유사시에는 신속히 적당한 방법을 강구할 것” 등을 지시한 전문이 한국인 학살의 큰 원인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치안유지를 위해 도쿄시내에 들어온 군대까지 가세했음을 밝히고 있다. 조사보고서가 제시한 자료 ‘관동계엄사령부 상보’에 따르면 9월 3일 도쿄 오오시마(大島)에서는 조선인 200명이 군인들에게 살해되는 등 3~4일 이틀간 230여 명이 살해됐다고 밝히고, 조사보고서는 “기록에는 군인들의 정당방위인 것처럼 돼 있으나 학살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관음사(觀音寺)

세끼 고센(關光禪)주지

 

일본 지바(千葉)현 야치요(八千代)시는 자위대 나라시노(習志野)부대가 있다. 1923년 9월 1일의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들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모아 놓은 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당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3천여 명의 한국인이 수용됐다가 일부가 살해당했다. 그리고 실제로 불이 난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이 방화했다는 소문이 나 돌아 시민들에 의해 6명의 한인들이 처형됐던 곳이다. 이들은 들판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 쳐졌다.

▲법현스님외 7명이 벌인 범패 영산재 공연(조선일보)


근처의 관음사(觀音寺)에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 오랫동안 공양을 했었다, 이를 알게 된 한국측에서는 지난 1985년 단청을 입힌 ‘보화종루’와 괘종을 만들어 기증하였다. 사건발생 80년 후 2003년 8월 31일 무더운 날씨 속에 보화종루에서는 종소리가 수십 번 울려 퍼지며 관동대지진 80주년 위령제가 열렸다. 법현스님 외 7명의 범패 공연, 김유감씨를 비롯한 19명의 새남굿, 이애주(李愛珠) 서울대교수의 진혼무 등 공연이 이어졌다. 무려 세 팀의 인간문화재가 참여한 위령제였다. 이 위령제는 대지진 발생 당시 일본정부에 의거 이국 땅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하여 불귀의 객이 된 2만여 명의 한국인 원혼을 달래는 추모 위령제였다.

이 절의 세끼 고센(關光禪)주지는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오랫동안 공양해 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세끼(關) 집안이 주지를 계승해 현 주지스님인 세끼 고센(關光禪)은 25대째이다.

 

1985년 종을 만들 때 건립문에 “오늘의 한국인은 어두운 역사를 미워하고 슬퍼할지언정 오늘의 일본, 일본인을 꾸짖고 싶지 않다”라고 적었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1954년 관음사의 주지가 된 세끼주지는 관동대지진을 직접 경험은 하지 않았으나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당시 이 부근에는 포로 수용소가 있어 러일전쟁시의 소련인 포로, 청일전쟁의 중국인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지요.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곧 유언비어가 퍼졌대요. 유언비어 내용은 「조선인이 민가에 방화를 했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화재를 당한 사람은 없었지요.” “많은 조선인이 끌려갔고 9월 5일경 군으로부터 조선인을 데려가라는 명령이 내려졌어요. 그래서 부근의 다까즈(高津) 농민들은 조선인을 인수하러 가야만 했어요. 이 절에서 300m 떨어진 곳에 나기노하라(ナギの原)라는 공유지가 있는데, 농민들은 관청에서 조선인의 손을 뒤로 묶은 채 데려와서 나기노하라에서 눈을 감기고 일본칼로 베어 그곳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어요.”


“나기노하라에서의 공양은 1959년경부터 선대에 의해 시작되었지요. 어느 날 마을에 살던 노인이 절에 찾아와서 조선인 학살자들의 공양을 하고 싶다고 해서 위령푯말을 세우고 매년 9월 학살된 장소에서 위령제를 올리게 되었어요. 전쟁이라면 몰라도 관동대지진은 전쟁도 아닌 당시 정부의 모략으로 조선인을 학살한 것이에요. 공포의 시대·군국주의의 악업의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1973년 관동대지진 50주년을 기념하여 치바현 내 각지에서도 조사가 행해지게 되었다. 이 성과를 자치체 문화연구소 후나바시(船橋)지소가 자료집 1집 『관동대지진과 조선인-후나바시시와 그 주변』을 정리했다. 1978년 6월 「치바현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 조사실행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실행위원회는 군대내부의 증언을 중심으로 자료집 제2집 『관동대지진과 조선인-나라시노(習志野) 기병연대와 그 주변』을 발행했다. 1983년 실행위원회가 『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人』를 아오키(靑木) 서점에서 발행, 그 후 9월 10일에는 관음사, 다까즈구, 실행위원회가 주최하는 위령제가 열리게 되었다.

유해발굴에서 관음사 안치까지
주지스님은 “발굴 공양은 구민(區民)이 회합을 열어 구민 전체 의견으로 실현되었어요. 오랜 시간이 흘러 희생자에게 죄송하나, 마침내 염원하던 발굴이 실현되어 다행이에요. 1998년 9월 24일 오전 8시 탈령식(脫靈式)에 이어 발굴 작업을 시작했어요. 증언을 토대로 나기노하라를 굴착기로 작업, 12시 15분경 유골이 나왔고, 저녁 5시경에는 발굴이 종료되었어요. 유골은 정성껏 물로 씻어 일단 관음사 납골당에 안치한 후, 화장을 하려고 야치요시에 접수했으나 유골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 당하는 등 곡절을 겪었지만, 화장을 끝내고 3개의 항아리에 담아 관음사로 옮겨 왔어요.”

1999년 9월에는 고즈지구 특별위원회와 추도조사실행위원회, 관음사의 합의 하에 위령비도 완성되었다. " 현재 위령비 밑에는 희생된 조선인 6명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학살의 모든 책임은 일본에 있으면서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부측에 의한 사죄도 행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뜻 있는 주지스님의 배려로 관동대지진의 희생자들은 관음사에서 그 영혼을 위로 받고 있다.
“사건은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지만, 일본인으로서 면목이 없어요. 참으로 야만적인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두 번 다시 이러한 참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사실을 정확히 널리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일본 전국에는 학살당한 한국인을 달래는 위령비가 14~15곳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치바현 야치요시의 관음사는 관동대지진의 비참한 역사를 증명하는 하나의 사적지가 되었다. (
www.5858.pe.kr 참조)

범종과 종루 건립

1985년에는 관음사 경내에 한국인 기부에 의한 범종과 종루가 설치되었다. 현대극장 대표인 김의경씨가 관음사의 위령제 이야기를 듣고 "대지진의 희생자에게 음지에서 이 같은 위령제를 지내 주어서 감사하다”라고 표하고 범종과 종루를 기증하게 되었다. 주지 스님은 "고국에서 만들어진 종을 치면 희생자인 죽은 자들의 영혼도 위로를 받을 수 있고, 가해자인 일본인들에게도 당시를 뒤돌아보며 반성시키는 데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여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1986년에는 한국불교회에 의한 위령탑 건립도 있었다.


◀관음사 경내 보화종루(普化鐘樓)(한국인과 일본인이 모두 평등하게 살라는 뜻)와 범종(보신각종의 1백분의 1 크기로 축소한 것). 한국인 현대극단 김의경 대표에 의해 기증되었다.
또 다른 학살 준비

제2학살 파티를 준비하라
2000년 12월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사회부는 1910년 단행된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과 더불어 ‘관동대학살 사건’을 일본의 20세기 10대 뉴스로 선정했다. 그만큼 관동대학살은 세기적 대사건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정부는 이 대학살에 대한 어떠한 사과나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일본 극우단체의 대표자 격이자 망언제조기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는 80년 전 악령을 되살리는 망언을 했다. 그는 2003년 관동대학살이 일어났던 똑 같은 장소인 도쿄 네리마(練馬)의 자위대 주둔지에서 행한 연설에서 “삼국인•외국인이 흉악한 범죄를 되풀이하고 있고 큰 재해로는 소요(逍遙) 사건조차 상정된다"며 "치안 유지를 위해서는 자위대가 출동하여 진압해 주기 바란다"고 정신 나간 소리를 했던 것이다. 이 말은 일본에는 타민족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공존의 철학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세계 여러나라에 퍼져 생활하고 있는 재외 한국인들이 그 나라에서 생활하는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유독 재일 한국인들만 한국인임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이시하라의 발언 중 첫 번째 문제가 되는 것은 ‘삼국인’이다. 삼국인이란, 일본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1만엔 지폐의 초상화 장본인인 메이지시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는 <學問のすすめ>라는 책 머리말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라는 말이 신선한 충격을 주어 그를 근대 일본의 계몽사상가로 불리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한국.중국.대만 등 제 아시아 국가들을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악우(惡友)'로 치부한 이중 인격자이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을 이러한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양과 진퇴를 같이하라고 하면서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장한 자이다. 바로 이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은 메이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3류 사무라이들에게 역사조작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한국.중국.대만 삼국을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악우(惡友)로 치부하면서 일본인들을 인간 도살자로 만들고, 아시아와 세계를 살인의 광풍으로 인도한 것이다.

한국.중국.대만인들을 멸시하여 지칭하는 삼국인은 80년 전 민족배외주의를 선동함과 동시에 재일 한국인들의 대학살을 상정한 발언이었다. 이시하라의 이러한 망발에 대해 일본인들은 70% 이상의 지지도를 보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다. 일본인들의 이와 같은 작태에 피해 당사자인 한국.중국.대만은 불 속으로 뛰어들 듯 더욱 전율시키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망언에 대한 일부 비판세력에 대하여 극우파와 극우 언론들은 ‘뭣이 문제냐’고 반격하고 당사자도 삼국인이란 외국인을 뜻하며 경멸용어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자기의 발언에 오해하고 있는데 유감이라고 큰소리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일본 청소년들이 전혀 죄의식 없이 재미 삼아. 경험 삼아 살인을 저지르듯이, 대학살을 저지르고도 반성이 없는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도자기 하나 만들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자들을 지도하고 한자,불교를 전파한 자가 바로 한반도인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삼국인은 바로 일본의 스승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일본은 아직까지 어떠한 배상이나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삼국인 발언은 또 다시 80년 전 악령을 부르겠다는 것이다.

★ 두 번째는 자위대를 출동시켜 치안을 유지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는 80년 전 치안을 핑계로 군대를 출동시켜 대학살의 시발점이 된 것과 똑같은 발상이다. 이는 戰前의 계엄령 체제와 다름없는 것이지만, 이시하라의 육해공 3자위대 출동 구상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1999년 8월호 'VOICE'지에서 오부치 수상이 총사령관이 되어 "육해공의 '삼군'을 사용한 재해시의 합동 대구제 연습을 해야 한다. 이것은 또한 어느 의미에서는 북한과 중국에 대한 위압도 된다. ……여기서 하는 것은 시가전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발상의 근원에 대해 "나카소네가 방위청장관을 하고 있을 때 계획을 세웠지만 미노베 지사가 행하지 않았으므로 자네가 되면 시행하라는 아이디어를 제공받았다"고 말했다.

이시하라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들의 망발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미친개를 처단하지 못한 역사에 기인하며, 역사조작으로 점철된 일본의 평균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우익 정치인들은 한국인, 중국인들에 대한 진압을 정책화하고 있다. 1999년 11월 전 육상자위대 북부방면 총감 시가다 토시유키를 동경도의 '재해대책고문'에 임명하고, 그의 의견을 기조로 재해대책을 세운 것으로 미루어 봐도 군사적 색채가 짙은 것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관동대지진 때 출동한 근위사단과 제1 사단은 '경비당도군 소견' 이라는 보고서를 남기고 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부정인의 소탕을 요한다. 부정선인 집단의 감시 등에는 요컨대 기관총을 소지하는 것이 유리하다" (부정인, 부정선인: 당시 한국인을 비하하여 지칭함)라고 적고 있다. 이‘경비당도군 소견’의 총괄 취지를 받아들인 방위청은 1960년 '관동대지진에서 얻은 교훈'을, 자위대 경시청은 1962년 '대지진대책-연구 자료'로 정리하고 있다. 요컨대 전 자위대 총감이었던 인물을 재해대책의 '고문'으로 임명한 일례를 봐도, 구 군 및 자위대 등의 면면히 이어지는 한국인을 주로 한 아시아인을 적대시하는 재해시의 진압정책을 도쿄도지사는 구체적인 시책에 포함시킨 것이다. (arirang21.com참조)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이웃이나 마을끼리 또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부풀어 오른 민중의 불평불만이나 증오심을 엉뚱한 곳에 옮겨 발산시키는 것을 전위(轉位)라 한다. 시어머니에 대한 반항을 직접 투사하지 못하고 바가지 긁는 소리로 희열을 느낀다든가, 부엌에 잠자고 있는 강아지 배때기를 들이 차 깨갱거리는 소리로 전위시킨 것도 그것이다. 과거 미국의 경기가 나빠지는 것과 백인의 흑인 린치 증가와는 정확하게 비례한다는 조사도 전위다. 바이마르헌법 이후 독일의 경제 침체로 중소기업과 중산계급의 욕구 불만이 높여갔다. 히틀러의 나치정권은 이 욕구불만의 탈출구로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배척, 학살을 내세워 전위시켰다. 그렇듯이 일본정부는 관동대지진 때, 재일 한국인 2만여 명을 무차별 도살시켰던 것도 천재지변에 의한 공포불안이 국가기반의 안위와 연결될까 봐 의도적으로 전위를 유도했었다. 일본정부는 그렇게 해놓고 유언비어에 의한 학살을 일본인들의 자위수단으로 변명하는데 일관해왔다.

일본 변호사연합회가 4년간의 조사 끝에 ‘나라가 허위사실을 전파’하여, 전위 학살에 정부가 개입한 것을 공인하고 사죄를 권고했는데도 묵묵부답 국가이기를 포기하고 있다. 소인배 섬나라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은 80여 년간 현해탄을 울어 헤매고 있는 2만여 원혼들의 곡소리를 얼마나 더 들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일본의 언론들은 2003년 9월 대지진 8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언론은 일본의 방재능력을 점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인류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자연재해 상태에서 일본정부가 의도적으로 유발한 한국인.중국인 대학살에 대한 만행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수만 명의 원혼들에 대한 과거 청산 노력이나 반성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의 우익 세력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최근에는 조총련 지방본부와 금융기관에 폭발물을 설치하거나 총격을 가하는 등 재일한국인에 대한 위협을 끊임없이 가하고 있다.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지적한 대로 메이지 쿠데타 때부터 시작된 악령의 민족차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일본은 일한병합을 통하여 일본인과 한국인을 동등하게 대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을 삼국인.조선인으로 비하하여 부르는 것과, 관동대학살 사건은 차별하였다는 것은 증명하는 것이요, 역으로 일본 스스로가 일한병합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일부 개인 및 기타단체에서는 양심적인 집회 및 추모제 등을 통하여 진실을 밝히고자 하고 있으나, 일본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일본이라는 국가는 비굴하게 뒤에 숨어서 개인 및 종교단체가 나서서 청소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국가의 존재와 기능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처사이다. 참으로 덩치에 맞지 않는 비극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런 작태를 보이고 있는 일본이라는 집단이 유엔 안전보장이사국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몇 년 전 일본은 아시아 GNP 70%까지 차지했지만, Pax Americana, Pax Britannica와 같이 Pax Japonica시대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본 민중은 역사를 되돌아보고,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물의 교묘하고도 천박한 선동적 언동에 단호히 "노"라고 맞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에서 신뢰를 잃게 될 것은 물론이고 세계인들로부터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독일은 과거 유태인들을 학살했던 아우슈비츠를 학살기념관으로 만들어 놓았고 학살현장에는 어김없이 역사기념관을 건립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는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바라는 뜻에서 이다. 그러나 일본은 공식집계 6천여 명 비공식집계 2만여 명에 이르는 이 관동대학살 사건을 정확하게 올바로 전달되기도 전에 역사 속에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다. 허나 이 관동대학살 사건은 역사 속에 진실로 용해되어 있어 일본의 뜻대로 잊혀질 사건이 아니다.

오늘에 사는 우리는 자신과 가정의 이익.행복을 추구하면서도 현재가 있기까지의 과거는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과거에 대해 눈감는 자는 결국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눈 멀게 된다. 우리는 1923년 9월1일 관동대학살은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연결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며, 일본의 책임 있는 해결책이 있을 때까지 결코 관동대학살을 잃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글,그림 www.5858.pe.kr 참조)

출처 : 신들의 황혼
글쓴이 : 은행 원글보기
메모 : 9월 1일, 관동대지진 91주년을 그냥 지나쳤다. 내년부턴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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