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원중거(元重擧)와 비점(翡點)

검하객 2015. 2. 4. 00:52

 元重擧(1719~1790)의 <승사록>. 원중거가 통신사의 서기로 일본에 갔던 1763년,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원중거의 <승사록>은 이미 2006년에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김경숙 역, 소명출판) 번역본이 598쪽에 이를 정도로 상당한 분량이다. 인연이 있어 오늘 이 책을 100여 쪽, 노정으로는 이끼섬(一岐島)에 도달하기 전까지 읽었다. 의아한 것은 아직 이 책의 원문이 공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고려대 도서관에 있다고 한다.) 역자도 서문과 해제 어디에서도 원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 자료에 대해서는 여러 편의 논문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논문들은 모두 이 번역본을 텍스트로 삼아 작성된 것인가? 경위야 알 수 없지만, 이래서야 논의의 진전이 있을 턱이 없다. 연구자에게 자료를 제공하여 번역까지 하게 했으면서도 원문을 숨겨놓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번역이야 대부분 정확하겠지만, 사이사이 미심쩍은 부분도 꽤 있고, 원문을 확인해야만 의미가 분명해질 부분도 많다. 하루 빨리 대국적인 견지에서 원문이 공개되기를 기대한다.

 

  8월 3일 한양을 떠난 원중거는 22일 부산에 도착했고, 10월 5일 부산항을 출발하기까지 40여일을 부산에 머물렀다. 그 사이 여러 차례 주연이 베풀어졌고, 각지에서 기녀들이 동원되었다. 그중에는 늙은 歌妓 翡點과 琴妓 英梅가 있었고, 12,3살 童妓인 小娥와 日翠도 있었다. 모두 경주에서 차출된 기녀들이다. 9월 18일 비점이 경주로 돌아가면서 원중거에게 인사를 했다. "평생 사람을 겪었으나 세 문사의 자리에서 화목하게 모인 것은 인간 세상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날의 심회를 원중거는 이렇게 기록했다. "남쪽으로 천 리를 와서 오직 이 여자 한 명만이 더불어 이야기할 만했으니 그 이별에 이르러 나 또한 몹시 슬퍼졌다."이 대목에서 나 또한 책을 덮고 한동안 비감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同氣는 相感이라, 심양강 상선의 기녀 출신 늙은 여인의 비파 줄 고르는 소리에 백거이의 마음이 먼저 울렸듯이, 세상에서 버려진 처지인 원중거와 비점의 마음이 서로 느꼈던 것이다. 연회에 참여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임금을 그리워했지만 모두 포즈일 뿐이다. 원중거는 무척이나 고독했던 것이다. 비녀가 떠난다는 말에 원중거는 가슴 한 구석이 무너지는 듯했고, 그녀가 떠나간 뒤 마치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 공허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아마도 경주 가는 길 나귀 위 비점의 마음도 그러했으리라.

 

  역사에서 원중거와 비점을 불러올 수 있다면, 지난주에 다녀왔던 충무로 동방명주 2층 방에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고 싶다. 요리는 두 접시면 족하되 술은 연태고량 2병은 있어야겠지. 많은 말이야 필요 있으랴. 말없이 술잔을 비우다가 마음이 울컥하면 비점이 노래를 하고, 가둬둔 비애가 문을 부수고 나오면 원중거가 시를 짓고, 말이 끊어지면 나는 술을 권해야지. 하여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이승과 저승의 장벽이 없어지며, 옳고 그름의 기준도 무너질 즈음이면, 내 두 손으로 원중거의 두 손을 꼬옥 잡아주고, 비점에게 다가가 5분쯤 안아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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