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원중거와 박제가

검하객 2015. 2. 12. 10:28

 

비가 와 원옹(元翁) 의 서루에서 발이 묶여  / 滯雨元翁書樓 (시집 권 1)

 

술은 적고 근심 깊어 시간이 더디 가니        酒淺憂深澆下遲

문 나서 홀로 가도 뉘 있어 날 알리오?        出門孤往有誰知

저물녘 남산 찾아 잠자리에 들었으니          黃昏却向南山宿

元老의 서루에서 빗소리에 잠기노라.          元老齋中聽雨時

 

10년 전 박제가의 문집 번역작업에 참여했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박제가의 56년 세월을 따라갔고, 그의 마음 깊은 곳을 여행했다. 참 자주도 울컥했고 비감에 사로잡혔다. 소년시절의 총기, 청년시절의 호기, 관직에 막 들어섰을 때의 패기,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짙어저간 울기, 그리고 시대와 불화하면서 발생한 분기, 그리고 끝내는 기가 꺾였다. 1790년 두 차례 연행에서 보여준 왕성한 교유, 난 그걸 조선에서의 절망이 양성한 병적인 증상이라고 해석했다. 아무도 내 글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안다. 그게 건강한 사회와 정상적인 우정의 발로가 아니었음을. 박제가도 외로웠고 나도 외롭다.

위 시는 1777년 여름에 지어진 것이다. 당시 원중거는 66세 박제가는 28세였다. 박제가의 집은 종로 탑골 공원 근처였고 원중거의 집은 남산 아래였으니 충무로 어디쯤이었을까? 박제가는 술을 마셨던 모양이다. 취기가 어설픈데 술이 떨어지니 무료하기 짝이 없다. 하여 답답한 마음에 집을 나섰으나 어디 갈 곳이 없다.2행에는 천지간을 고왕독래하는 외로움이 배어있다. 발길이 안내한 곳은 자기보다 38세나 많은 원중거의 집이다. 그나마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찾은 것이다.이날 박제가는 그 집에서 묵었다. 비가 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나마 울적한 마음을 달래며 하루를 묵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겠다.

박제가는 자신을 말했지만, 그 말 속에는 원중거도 들어있다. 소연 때문에 원중거를 불러와 만났고, 원중거 때문에 옛 벗 박제가와 다시 상면했다. 그 사이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박제가의 무덤이 내가 사는 광주 掩峴(은고개) 어딘가에 있다는 족보의 기록에, 겨울 며칠 그 무덤을 찾는다고 산을 헤맸던 기억이 새롭다. 원중거와 박제가는 모두 현실 속의 홍길동, 서얼이었다. 나의 신분도 서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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