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자발적 입관

검하객 2015. 5. 7. 10:25

 때로 우리는 마시기 전에 취하고, 숨이 멎기 전에 죽으며, 상처입기 전에 아프기 시작한다. 알레르기피부염 때문에 병원을 찾아갈 때부터 나는 졸렵기 시작했다. 낯이 익은 간호사는 웃으며 한참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예약을 안했으니 예상했던 바이고, 예약을 했던들 얼마간 기다리는 게 무어 대수랴. 나는 벌써 졸고 있었다. 밖 대기실에서 졸고 있는데 간호사가 잠을 깨웠고, 가까운 대기실에서 벽에 기대 조는데 간호사가 또 이름을 불렀다. 병원을 나와서 몽유처럼 까페를 찾아드는데 까페는 무덤처럼 문이 열려 있었다. 손에 들린 책은 장 그로니예의 <섬>. 1988년에 나온 김화영이 번역한 것이다. 글씨가 깨알처럼 작다. 몽롱한 가운데 고양이 물루의 죽음(<고양이 물루>)과 푸줏간 친구의 죽음(<부활의 섬>)이 안개처럼 나를 감싸준다. 관 속에 눕는 느낌으로 눈을 감았다. 죽음 충동에 사로잡힌 에시메이얼이 포경선 항구 도시 뉴페드퍼드에 들어간 묵은 여관 주인의 이름은 코핀[]이었다. 1시간 뒤 나는 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무덤을 빠져나왔다. 피쿼드호에서 탈출한 이시메이얼처럼!

 

 

Moby Dick (1851). 

 서술자 이시메이얼에는 추방자, 방랑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창세기16장에 나온다. 뉴베드퍼드는 미국 메사추세스 남동부에 있는 시로 보스턴에서 남쪽으로 90km 떨어진 곳에 있다. 1765년부터 1820년대까지 고래잡이 항구였다. 외다리의 미치광이 선장의 이름은 에이허브이다. 구약성서 열왕기에 나오는데, 포악한 군주로 그가 죽었 때 개도 그 피를 핥지 않았다고 한다. 101쪽에 처음 이름이 나오고, 109쪽에 내력이 설명되어 있다. 그가 첫 돌 때 미친 과부였던 그의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인데, 인디언 노파에 따르면 그 이름 자체가 예언이라고 한다. 이들이 탄 배의 이름은 피쿼드이다. 피쿼드는 고대 메디아(기원전 6,7세기에 멸망한 소아시아의 제국)처럼 멸망해 버린 메사추세츠 인디언의 유명한 종족의 이름이다. 여기에는 멸망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시메이얼과 퀴케그가 찾아간 여관은 검정 칠을 한 엄청나게 큰 두 개의 나무 냄비가 낡아빠진 문 앞에 세워진 고물 돛대 꼭대기 가름대에 걸려 있었다. 그 대나무 끝 두 갈래 나무의 한쪽 끝은 떨어져 나갔으므로 이 낡은 중간 돛대는 마치 교수대처럼 보였다. 아마도 틀림없이 그때 나는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았겠지만, 이 교수대를 지켜보고 있는 동안 어떤 막연한 불안감에 쫓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아 있는 두 개의 갈라진 나무, 더욱이 그 두 개는 퀴퀘그의 것과 나의 것일까 하고 바라보는 동안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전에 들렀던 고래잡이들의 교회에 들어갔더니 비석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나서 이 교수대이다. 게다가 괴물처럼 시커먼 냄비가 두 개, 이것이야말로 지옥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모비 딕>의 초반부는 죽음과 멸망에 대한 징조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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