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김현승, <가을의 기도>)
"당신을 위한 나의 기도가 / 그대로 / 한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 --- 때로는 아까운 말도/ 용기 있게 버려서 더욱 빛나는 / 한 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 (이해인, <서시>)
오늘 아침 때아닌 기도를 한다. 중간고사 기간에 여유가 있다 싶어 넣어둔 논문을 다시 꺼내 먼지를 털었다. (<1386년 정몽주의 남경 사행, 노정과 詩境>) 웬걸 아니나 다를까, 나의 세계는 금방 사막이 되었다. 이슬이 내리지 않고 물이 흐르지 않는, 초목이 자라지 못하는, 메마른 바람만 오가는. 이건 논문을 쓸 때마다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니 논문 쓰기가 고통스러운 것이다. 지난 20년 나는 그렇게 황폐해져왔다. 그 세계엔 나도 없고 너도 없다. 생명이 없는 언어와 물이 흐르지 않는 논리가 있을 뿐이다. 물론 그건 논문의 문제라기보다는 나의 문제, 나의 수준 때문이다. 하여 오늘 나는 기적을 기대하며 이렇게 기도해본다.
"당신을 향한 나의 그리움이 / 그대로 / 한 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 // 사막의 언어에 / 이슬이 내리고 꽃이 피는 / 풍경이 펼쳐지게 하소서 // 때로는 들레고 넘치는 말도 / 아낌없이 덜어내고 소리를 줄여 눈부시지 않은 / 한 곡조 노래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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