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좋은 계절이 봄이지만, 봄날엔 언제나 바람이 불고 사람들은 시름에 젖는다. 겨울은 죽음의 계절이니 거기에 지지 않으려 안간힘쓰고, 한여름도 무더위를 견디느라 딴 생각할 여력이 없다. 가을은 온갖 사물이 다 비장한 시름에 젖어있다. 내 시름은 나만의 것이라기보다는 전체의 일부이다. 그러니 가을의 정서는 동질감이거나 일체감, 또는 감염이다. 하여 우리는 너나 없이 죽음(겨울)을 예감하며 비장해진다. 봄철 시름의 원인은 위화감이다. 세상은 그토록 화사한데 내 삶은 그렇지 못해서이고, 꽃은 피었다가 순식간에 속절없이 흩날리고니 그 영화가 너무 짧아 덧없는 삶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 대조가 선명하여 예로부터 수많은 이별노래들은 봄날을 배경으로 한다. <황조가>그 그렇고, <동동>이 그렇고, <만전춘별사>도 그러하며, <송인>도 다르지 않다. 이조년의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 ~"나 매창의 시조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갑자기 온갖 꽃들이 피어난 이 봄날에 나는 심연 같은 허기를 느낀다. 이 허기 속에서는 어떤 언어의 새도 내려 앉을 곳을 찾기 어렵고, 어떤 의미의 배도 정박할 부두가 없어 다시 바다로 밀려나간다. 아래는 선배들 시의 일부인데, 제목은 다 春愁이다.
시름은 봄과 함께 오더니 愁來春與俱
봄이 떠나도 시름은 남네 春去愁猶在
시름 남겨 내게 보내니 留愁寄我去
봄날이 속였다 아니라 하랴 豈非春我紿 (신숙주, 1417~1475)
가무 한창인 臺閣에는 들지 못하고 歌臺舞閣入無因
골목에 숨어사는 사람을 찾아오네 却來窮巷尋幽人
유인은 피하려도 피할 땅 하나 없고 幽人欲避避無地
시름은 신의 있어 신의가 빌미 되네 愁獨有信信亦祟 (서거정, 1420~1488)
봄 시름이 천지간에 가득이 차있으니 春愁茫茫塞天地
한 생각 트기도 전 시름이 먼저 오네 一念未萌愁先至
눈 들면 자욱하게 다시 또 일어나서 擧眼油然忽復生
역병처럼 찾아오니 무슨 수로 피하리오 尋人似疫何由避 (김시습, 1435~1493)
마음속에 별다른 일이 없어도 中心自無事
봄만 오면 시름이 생기는구나 逢春還有愁
말하려도 잡아낼 표현이 없고 欲語無可執
풀려 하나 도 단단히 얽혀있구나 欲解同綢繆 (이호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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