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擇細流

독레미제라블 1

검하객 2013. 6. 9. 17:04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도스토예프스키 정신이란 자칫하면 낭비인 것 같소. 위고를 불란서의 빵 한 조각이라고는 누가 그랬는지 至言인 듯싶소."

 

 이상은 "날개"의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엽서) 형식이다. 젊은날의 이상은 아마 일본어로 번역된 도스토예프스키와 위고의 소설을 보았던가 보다. 아직 이게 무얼 뜻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레미제라블"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졌다. 위고는 1802년에 태어나 1885년에 죽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1821년에 태어나 1881년에 죽었으니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셈이다. 1848년 2월 혁명을 계기로 철저한 공화주의자로 변신했고, 1851년 나폴레옹 3세의 집권과 함께 19년 간 망명과 도피 생활을 했는데, 그 사이에 아내와 자식들을 잃었다. "레미제라블"은 1862년에 발표되었다. 1866년의 "죄와 벌", 1871년의 "악령", 1880년의 "까라마조프 형제들"보다는 조금 일찍 나온 셈이다. 

 

 1부 팡틴, 2부 코제트, 3부 마리우스, 4부 플뤼메 거리의 서정시와 생 드니 거리의 서사시, 5부 장 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은 1부 중에서 <올바른 사람> (111쪽)까지 읽었다. 모두 미리엘 주교에 대한 소개이다. 미리엘 주교는 1741년생으로 이덕무와 동갑이다. 서술 시기는 1815년이다. 디뉴 지방에서 비앵브늬 예하로 불리는 미리엘은 겸허하고 청빈하며 관대한, 그리고 약자와 가난한 자를 무한히 사랑하여 디뉴 지역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주교이다. 도도하게 펼쳐지는 주교의 언행에는 정말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추후 정리) 그는 어느날 숲속에 은둔하는 옛 국민의회 의원 - 역사의 진보와 혁명의 정당성을 확신하는, 영달과 권익을 넘보지 않고, 상대방을 보호하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혐오를 마다하지 않으며 고독한 말년을 보내는 - 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그가 죽음 직전에 들려준 이야기들로 인해 주교는 많은 충격을 받는다. 주교는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었던 권력 중심의 가치관이 허위를 깨닫는다. 가난한 자에 대한 그의 무한 사랑은 역사 사회적 통찰이 결여되어 있었고, 인류의 진보를 위한 분노와 행동의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2장은 <추락>이다. 이제 그 유명한 대목, 장발장이 찾아오는 장면이 펼쳐질 듯하다. 

 

 첫 문장, 첫 단락

 

 "1815년, 샤를 프랑수아 비앵브뉘 미리엘 씨는 디뉴의 주교였다. 그는 일흔다섯쯤 된 노인으로, 1806년 이래 디뉴의 주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주교관과 초라하고 옹색한 자선병원을 바꾸다. (16,7)

 

 사회는 스스로 만들어 낸 암흑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마음속에 그늘이 가득 차있으면 거기에서 죄가 범해진다. 죄인은 죄를 범한 자가 아니라, 그늘을 만든 자다." (31)

 

 비인간적 선택을 강요하는 아우슈비츠같은, 교활하고 간악한 권력(검사)에게, "그러면 검사 영감은 어디서 재판을 받을 건가요?" (32)

 

 단두대 체험 (36),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 체험, 오웰의 <교수형>

 

 "의사의 집 문은 결코 닫혀 있으면 안 되고, 목자의 집 문은 늘 열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에게 숙소를 달라는 사람에게 그 이름을 묻지 마라. 스스로 이름을 밝히기 거북한 자야말로 특히 피난처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49)

 

 산적이 곧 주이다. (54)

 

 "편견이야말로 도둑이고, 악덕이야말로 살인자야." (55)  

 

 [1장 올바른 사람]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역시 <10절 미지의 빛을 접한 주교>이다.

 

 "루이 16세로 말하자면 난 반대했소. 나는 한 인간을 죽일 권리가 내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러나 악을 절멸시킬 의무는 있다고 생각하오. 나는 폭군의 종말에 찬성했소. 다시 말해서, 여성에게는 매음의 종말, 남성에게는 노예 상태의 종말, 아동에게는 암흑의 종말이오. 나는 공화제에 찬성함으로써 이와 같은 것에 찬성한 거요. 우애와 화합, 여명에 찬성한 거요! 편견과 오류의 붕괴를 도운 거요. 오류와 편견의 붕괴는 광명을 가져오지. 우리는 낡은 세계를 무너뜨렸소." (77)

 

 "슬프게도 작품이 미완성이었다는 걸 나도 인정하오. 우리는 현실에서는 구체제를 무너뜨렸지만, 사상에서는 그것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었소. 폐습을 타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오. 풍차는 없어졌지만 바람은 아직 남아있소."

 

 "권리에는 분노가 있는 것이오, 주교님. 권리의 분노는 진보의 한 요소요. 그야 어쨌든,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하든, 프랑스혁명은 그리스도의 강림 이래 인류의 가장 힘찬 한 걸음이었소. 미완성이긴 했지. 그러나 숭고했소. 혁명은 모든 사회적 미지수를 끄집어냈소. 혁명은 인간의 정신을 온화하게 하고 진정시키고, 위안하고, 밝게 하였소. ---" (77,78)

 

 "루이 17세! 좋소. 그런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슬퍼하시오? 그가 무고한 어린아이였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좋소. 나도 당신과 함께 슬퍼하겠소. 아니면 그가 왕자였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좀 깊이 생각해 보시오. 카르투슈의 아우는 오직 카르투슈의 아우라는 죄만으로 그레브 광장에서 양쪽 겨드랑이를 매달아 마침내 죽게 했는데, 이 무고한 어린아이의 죽음은 나에게는 오직 루이 15세의 손자라는 죄만으로 탕플 탑에서 고통스럽게 죽은 루이 15세의 무고한 어린 손자 루이 17세의 죽음 못지않게 가슴 아픈 일이오." (79)

 *카르투슈(1693~1721) 프랑스의 유명한 비적 두목. 그레브 광장에서 산 채로 車裂에 처해졌다.

 

 "루이 17세 이전에 우리의 눈물이 시작되어야 하오. 나는 당신과 함께 어린 왕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겠소. 다만 당신이 나와 함께 민중의 어린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 준다면." (80)

 

  "나는 오스트리아 황녀이자 프랑스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엾게 여기지만, 나는 또한 루이 대왕 치하였던 1685년 아기에게 젖을 주다가 잡혀 허리까지 발가벗겨진 채 아기와 떨어져 말뚝에 결박되었던 저 가련한 신교도 부인도 가엾게 생각하오. 그녀의 젖가슴은 젖으로 부풀었고 가슴은 고통으로 부풀었소. 배가 고파 파리해진 아기는 그녀의 젖가슴을 보면서 괴로워하며 울부짖는데, 사형집행인은 어머니요 유모인 그 부인에게 '개종하라!'라고 말하면서 아기의 죽음과 양심의 죽음 중 선택하게 하였소. 한 어머니에게 적용된 이 탄탈로스의 처형을 당신은 어떻게 보시오? 이 점을 잘 기억해 두시오. 프랑스혁명은 이유가 있었소. 그 분노는 미래에 용서를 받을 것이오. 그 결과는 더 나은 세계요. 그는 가장 무시무시한 타격으로부터 인류에 대한 애무가 나오는 거요. 이만 줄이겠소. 이만 그치겠소. 내가 너무나도 유리하니까. 더구나 나는 이제 곧 죽을 것이오."(85)

 

  "그렇소, 진보의 난폭함을 혁명이라 부르오. 혁명이 끝나면 사람들은 인정하오. 인류는 곤욕을 치렀으나 진보했음을."((86)

 

 "진보는 하느님을 믿어야 가능하오. 善은 믿음 없는 하인을 가질 수 없소. 무신론자는 인류의 나쁜 지도자요."(주교) ---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노인이 하늘 쪽으로 손가락을 올리며 말했다. "무한은 존재한다. 무한은 저기에 있다. 만약 무한에 자아가 없다면, 이 나의 자아가 그것의 한계가 될 것이다. 그러면 무한은 무한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한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한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아를 갖는다. 무한의 자아, 그것이 곧 神이다." (87)

 

 "주교님." 하고 그는 천천히 말했는데, 이 느릿느릿함은 아마 기력의 쇠약에서라기보다는 영혼의 존엄에서 오는 것이었으리라. "나는 부자가 아니었소. 나는 국무위원 중 한 사람이었는데, 국고의 금고는 은화의 무게로 무너져 가는 벽을 기둥으로 괴지 않으면 안 되었소. 그러나 나는 아르브르세크 거리에서 1일분에 22수짜리 식사를 했소. --- 내가 제단 보를 찢은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조국의 상처에 붕대를 감기 위해서였소. 나는 언제나 인류가 광명을 향해 전진하는 것을 도왔고, 때로는 무자비한 진보에 저항하였소. 경우에 따라서는 나 자신의 적인 당신네들을 보호하기도 하였소. --- 무지몽매하고 가련한 군중에게 내 얼굴은 천벌받을 놈 같은 얼굴로 보이겠지만, 나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증오받는 사람의 고독을 감수하고 있소. 지금 내 나이 여든여섯이오. 나는 곧 죽을 것이오." (88)   

 

 주교의 정신 앞을 지나간 그의 정신과 주교의 양심 위에 반영된 그의 위대한 양심이 주교가 완전의 경지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으리라. (89)

 

  소설 초반에서 가장 강렬하고 인상적인 이 국민의회 의원은 그냥 G라고만 소개되어 있다. 그의 빛나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게 못내 아쉽지만, 아마 이름의 허위성을 경계하여 그렇게만 처리했으리라.

 

 <12. 비앵브뉘 예하의 고독>은 세속의 원리가 그대로 작용하는 수도원의 현실을 냉정하게 갈파한다. 여기에서 비앵브뉘의 고독이 태어난다. 그리고 성공담이 지닌 허위도 해부한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성공이란 참 끔찍스러운 것이다. 진실한 가치와 성공의 허울뿐인 유사성이 사람들을 속인다. 군중에게 성공은 우월성과 거의 같은 모습을 띤다. 재능과 쌍둥이같이 닮은 성공에 속는 것이 있다. 즉 역사다. 오직 유베날리스와 타키투스만이 그것에 대해 불평한다. 오늘날에는 거의 공인된 철학이 하인의 신분으로 성공의 집에 들어와 성공의 사환복을 입고 그 응접실에서 시중을 든다. 성공하라, 이것이 학설이다. ‘영달’은 곧 ‘능력’이라고 추측된다. 복권에 당첨돼라, 그러면 그대는 재주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승리하는 자는 숭배 받는다. 행복해라, 그러면 사람들은 그대를 위대하다고 믿으리라. 동시대의 찬미는 거의 근시에 불과하다. 금박이 황금이다. 누가 되었든 벼락부자가 되기만 하면 상관없다. 모세 같은 사람이 되고, 단테 같은 사람이 되고,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이 되고,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되는 그러한 놀라운 재능을 군중은 목적을 달성한 자라면 누구에게고 대번에 환호하며 갖다 바친다. 그들은 바다에 비치는 별자리와 진창의 진흙에 나 있는 오리 발자국을 혼동한다."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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