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6년 4월 17일 저녘 揚州에 도착한 정몽주는 6언시 한 수를 지었다. 제목은 <楊州>이다.
옛 초나라 산천을 지나가면서 經過楚地山川
수나라 적 궁궐을 상상해본다 想像隋家宮闕
지난날 흥망을 뉘 탄식하리오 往時興廢誰嗟
오늘날의 번화만 누리면 그뿐 此日繁華可悅
선화는 아득하여 찾기 어렵고 仙花杳杳難尋
관가 버들 늘어져 꺾을 만하네 官柳依依堪折
저물녘 와 우연히 목란 배 대니 晚來偶泊蘭舟
스물 네 다리 아래 달이 밝아라 二十四橋明月
양주에서 정몽주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隋나라 흥망의 역사 사연이다. 煬帝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고 대운하를 건설할 무렵 江都(揚州)는 隋나라의 경제 중심 도시였다. 잦은 전쟁과 부역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양제는 616년 강도에 와서 丹陽(지금의 南京)에 궁궐 조성을 지시하며 천도를 준비하다가 618년 측신들에 의해 시해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연으로 양제의 무덤이 지금도 양주에 남아있다. 정몽주는 옛 사연을 떠올리다 무심결에 3,4구를 읊조렸다. 지금 명나라 태평 세상이 열렸으니, 오래 전에 이곳서 사라진 隋나라의 흥망을 따질 게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토록 신흥 왕조 명을 칭송하며 새 시대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있던 정몽주는, 이로부터 불과 5년 여 만에 고려가 신흥 조선에 의해 멸망하고 자신은 그 세력에 의해 죽게 될 줄은 꿈에도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여러 가집에는 시조 “仙人橋 나린 물이 紫霞洞에 흘너 들어, 半千年 王業이 물소ᄅᆡ ᄲᅮᆫ이로다, 아희야 故國興亡을 물어 무ᄉᆞᆷ ᄒᆞ리오.”가 정도전의 작품으로 실려 있다. 새 왕조의 창업을 주도했던 인물이 읊조렸을 법한 노래이다. 몇 년 뒤에 일어날 일도 알지 못하고 이와 똑같은 어조의 노래를 흥얼거렸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옛글을 읽다가 책을 덮고 탄식한다 함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 시험기간을 이용하여 1386년 정몽주의 남경 사행을 정리했다. 위 글은 이 논문의 결론 부분이다.)
양주 24橋는 그 연원이 꽤 멀다. 이에 대한 첫 기록은 杜牧의 시 「寄揚州韓綽判官」의 구절 “二十四橋明月夜, 玉人何處教吹簫.”이다. 하지만 24교의 기원과 실상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견이 분분하다. 24교가 있었다면 아마 이런 모양이었을까?
'시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 개의 멍에를 짊어진 비루먹은 馬의 노래, 김용범 (0) | 2015.05.20 |
---|---|
정몽주의 풍경화 소품 두 점 (0) | 2015.05.16 |
취과양주귤만거(醉過揚州橘滿車) (0) | 2015.05.14 |
詩境에 대하여 (0) | 2015.04.18 |
먼 데 벗을 그리며 (0) | 2015.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