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의 인물로 각인된 역사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정몽주는 사물이나 심리의 미묘한 정황 포착에 능한, 매우 섬세한 감성을 지닌 시인이었다. 그러한 면모는 1386년 사행 시에서도 드러난다. 아래 두 시는 정몽주의 섬세한 감성에서 빚어진, 민요풍의 작품이다. 두 시는 똑같이 강을 배경으로 명시적으로 발화되기 어려운 묘한 감성을 그리고 있는데, 절구 특유의 기승전결 구성이 차분하면서도 역동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미인이 목란 배를 가벼이 저어 가며 美人輕漾木蘭舟
꽃가지 등에 꽂고 물결에 비춰 보니 背揷花枝照碧流
남북으로 제 길 가는 배 위의 길손들은 北楫南檣多少客
애간장 끊으면서 일시에 돌아보네 一時腸斷忽回頭
강남의 계집아이 머리에 꽃을 꽂고 江南女兒花揷頭
깔깔대며 벗과 함께 물가에서 노닐다가 笑呼伴侶游芳洲
노 저어 돌아올 제 해는 막 지려는데 蕩槳歸來日欲暮
짝 지어 나는 원앙 무한 시름 자아내네 鴛鴦雙飛無限愁
위의 시는, 강 위에서 벌어진 순간의 장면을 떠낸 것이다. 배 위에는 한 미인이 고개를 숙여 물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등에 꽃을 꽂았으니 기녀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고개를 숙인 뒷모습만이 제시되어 감추어진 매력과 묘한 신비감을 자아낸다. 轉句에서는 그 주변을 오가는 배들과 그 위 남정네들로 시상이 전환된다. 시간의 흐름보다는 장면의 전환인 셈이다. 시상이 수렴되는 장면은 일시에 여인을 돌아보는 남정네들의 애 닳는 시선들이다. 미인의 뒷모습으로 시작하여 남정네들의 시선으로 마무리한 시상의 전개가 역동적이다. 본능에 이끌린 수많은 남정네들의 시선과 여기에는 전혀 아랑곳 않고 자기 모습에 취해 있는 미인의 모습이 묘한 대조감을 자아내면서 입체감을 형성한다. 여인의 시선과 남성들의 시선, 여인의 자아 성찰 및 시름과 길손들의 본능 · 욕망 사이의 불일치와 어긋남이라는 삶의 진실이 이미지의 대조로만 그려져 있다. 이는 삶의 진실은 모순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원숙한 인식의 산물인데, 이 전체 화면을 포착한 시인의 시선은 감추어져 있다. 무한한 상상의 해석을 일으키는 작품이다.
아래 시는 사춘기 소녀의 은밀한 감성을 대상으로 삼았다. 앞 두 구는 머리에 꽃을 꽃아 한껏 멋을 낸 채 벗과 함께 웃고 떠들면서 5월의 물가를 노니는 소녀의 발랄 경쾌함을 그렸다. 이러한 밝은 분위기는 轉句에서 일변하는데, 그 계기는 일몰이다. 날이 저물어 돌아오는 것이 일상의 논리지만, 시에서는 돌아오니까 날이 저무는 것으로 인과관계를 도치했다. 위의 시와는 달리 시간의 흐름이 가져온 변화인 셈이다. 변화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행동[笑呼]에서 내면[愁]으로 바뀌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밝음에서 어둠으로의 전환이다. 이 두 차원의 전환을 일으키는 외적 계기의 하나는 ‘날이 저묾’이고, 또 하나는 ‘짝 지어 나는 원앙’이다. 저물녘 짝 지어 나는 원앙의 모습에 왜 소녀가 문득 깊은 시름에 잠겼는지는 여백으로 남겨놓았다. 그 이유를 꼬집어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감상의 묘미는 이 전환을 포착하는 것이고, 그 안에 담긴 은미한 내면을 상상 또는 공감하는 일이다.
1954년에 발표된(손노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 <봄날은 간다>의 2절은 다음과 같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왜 열아홉 처녀는 황혼 속에 슬퍼졌을까? 이 마음을 알면 저물녘 문득 무한 시름에 잠긴 위 시의 화자의 심경도 알 수 있으렸다.
* 미발표 논문의 일부임. 정몽주의 두 점 풍경화 소품이 무척 아름다워 혼자 즐기기에는 아까워, 혹 인연 있는 누군가의 눈길이 닿을 것을 기대하며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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