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서얼 정체성

검하객 2015. 6. 26. 14:06

  양반 첩의 자손을 서얼(庶孼)이라고 했는데, 그 어미의 신분에 따라 또 庶子와 孼子가 나누어졌다. 여기 따르면 홍길동은 얼자인 셈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서얼은 문·무과나 생원 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여, 첩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하였다. 때때로 서얼이 제한된 범위에서 등용되기도 했는데, 그것 역시 아버지의 관직의 높낮이에 따라 또는 어머니의 양천인() 신분에 따라 한계가 그어져 있었으며, 대체로 그 관직도 양반이 천하게 여겨 종사하지 않는 기술직에 제한되었다. 16세기부터 서얼 허통에 대한 요구가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기득권의 반발에 부딪쳐 끝내 시행되지 못했다.

 그간 나도 조선시대의 여러 서얼들과 심교를 맺어왔다. 삼한습유를 번역하고 충주에 가서 김소행의 후손을 만나고 그 산소를 찾아갔는데, 그는 서얼이었다. 박제가를 만나 그 처지에 깊이 공명했고, 한때는 그의 무덤을 찾아다녔다. 박제가의 주선으로 유득공이나 이덕무 등과도 사귀었다. 허구 속의 박제가, 홍길동을 만났다. 한때 그 삶이 안타까워 마음이 울울했던 사람은 박안기(朴安期, 1608~?)이다. 36세 때인 1643년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일본에 가서, 에도의 학자들에게 천문역학을 전수하였다. 이를 토대로 천문분야지도(天文分野之圖)」[1677, 시부카와 하루미(涉川春海, 1639~1715)]가 제작되었다.

  그는 짧은 시간에 한일문명교류사에 한 점 흔적을 남겼고, 그의 영향이 배어있는 천문분야지도는  버젓이 남아있지만, 박안기의 이름 석 자는 우리 역사에서 찾아볼 길이 없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서얼이었기 때문이다. 172412(영조 즉위년) 5000명의 서얼들이 연명으로 서얼의 허통을 요구했던 상소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전 군수 권칙(權侙)이 그의 벗 박안기의 죽음을 조문하는 시에 이르기를, "명부에선 문벌 신분 따지지 않을 테니, 능력껏 글을 짓는 박사인(朴舍人)이 되시게나. 冥司不必論門地, 好作修文朴舍人.”라고 하였다. 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의 행간에 신분제의 구속 아래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박안기와 권칙의 평생 고통이 배어 있다. 사인(舍人)은 조선시대 주로 글과 관련된 업무를 맡았던 정4품 벼슬이다.

  (위 글에는 아들이 태어났을 때 李翬이 지은 시도 소개하였다. "아들 낳아 모두들 기뻐하지만, 남 달리 내 마음은 그렇지 않네. 세상살이 가운데 무한한  고통, 너에게 또 다시 넘어가리니. 生子人皆喜, 吾心獨不然, 世間無限苦, 於汝又將傳.)

   과학사가들은 한국과 일본 사이 과학기술의 우열이 바뀌는 시점이 17세기라고 말한다. 17세기까지 일본에 과학기술을 전수하는 입장에 있었던 한국은, 그 이후 일본에 비해 열세에 놓이게 된다. 이는 그 뒤 식민지라고 하는 비극으로 귀결된다. 이 심각한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인재를 거둬 쓰고 대접하는 방식에서, 그리고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연유한다. 조선은 서얼이라는 이유를 인재와 그 능력을 버린 데 반해, 일본은 조선의 서얼이 전해준 지식을 귀하게 여겨 과학기술의 싹을 틔웠던 것이다.  6년쯤 전인가 그의 후손들을 만나 알려지지 않은 행적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요즘은 원중거를 좇아다닌다. 아주 소소한 성과들을 거두었다. 원중거는 1763년 사행의 서기로 참여했다. 원중거는 박안기가 태어나고 111년이 지나 세상에 나왔고, 박안기가 일본에 다녀온 뒤로 120년이 지나 일본에 다녀왔다. 원중거는 승사록과 화국지를 남겼다. 언제부턴가 나는 계속 이 서얼들과 교감해오고 있다. 당시 양반과 서얼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높았고, 하여 서얼들을 서얼들과 주로 어울렸다. 일종의 지기상감에서 비롯한 동류의식인 셈이었다. 

 

  나? 돌이켜보니 또한 서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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