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차창 밖으로 하얀 운해가 끝이 없다. 인류는 우주의 층위를 상상해왔다. 보통 천상과 지상과 지하를 그렸고, 하늘이 33개라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층위는 없고, 지식의 층위가 있을 뿐이다. 1780년의 심양에서 광녕 사이 여정을 정리하며, 연암은 기막힌 생각을 떠올려 그 일부를 메모했다. 하지만 이 글은 열하일기가 미완인 것처럼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외형의 완결과 미완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지식의 크기가 세계의 크기이고, 이는 태도나 자세와도 관련된다. 미지의 설정하지 않는 지식은 위험하다. 아래는 <일신수필서>이다. 목단강사범학원 국제교육학원 508호에서 다시 읽어본다. 마지막 단락 마지막 문장의 의미가 아직 석연치 않다.
? 그저 들어 말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학문을 말할 수 없거늘, 하물며 평생 생각이 닿지도 않은 영역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 하랴!
徒憑口耳者, 不足與語學問也. 况平生情量之所未到乎!
⇒ 들은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듣는 사람과는 학문을 말할 수 없다. 학문이란 의심하고 사유하고 세계를 확장하는 행위이다. 口耳에 기대는 자, 旣知에 머물면서 그 밖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할 줄 모르는 자는 누구인가? 단락 ?에 나온다.
? 성인께서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보셨지 라고 하면, 속으론 이해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동조할 것이다. 하지만 부처가 시방세계를 보았다고 하면, 지어낸 말이라 물리칠 것이요, 서양 사람들이 큰 배를 타고 지구 밖을 돌았다고 하면, 그 사람 참 비싼 밥 먹고 헛소리 한다며 타박할 것이다. 나는 누구와 천지의 대관을 이야기하단 말인가!
言聖人登泰山而小天下, 則心不然而口應之. 言佛視十方世界, 則斥爲幻妄, 言泰西人乘巨舶, 遶出地球之外, 叱爲恠誕. 吾誰與語天地之大觀哉!
⇒ 구이에 기대는 자는 태어나서 주구장창 유가의 글만 읽고, 그것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들은 불가의 견해는 물론, 서구의 과학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조선에는 더불어 학문을 말할 수 있는 이가 없다.
? 아, 성인이 240년 사이의 일들을 적고 깎은 것을 春秋라고 하는데, 이 240년 사이에 있었던 사신이 오가고 군사가 충돌했던 일들은 꽃이 피고 잎이 진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아하, 내가 지금 붓을 달려 여기까지 썼는데, 먹을 찍는 시간이야 순식간이지만 그 사이에 문득 小古와 小今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古今이라는 것도 大瞬大息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명예와 사업을 세우려 낑낑대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噫, 聖人筆削二百四十年之間, 而名之曰春秋. 是二百四十年之頃, 玉帛兵車之事, 直一花開木落耳. 嗚呼, 吾今疾書至此, 而一墨之頃, 不過瞬息, 一瞬一息之頃, 奄成小古小今, 則一古一今, 亦可謂大瞬大息矣. 乃欲立名立事於其間, 豈不哀哉!
⇒ 시간의 단위를 말한다. 두 가지를 말한다. 古今과 瞬息은 물리적인 시간 양의 차이가 크지만 결국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는 것, 그리고 시간의 양보다는 그 질적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 口耳에만 기대는 사람들은 그 사라지는 시간 속에서 맹목적으로 명예와 사업만을 좇는다. 그들과는 수준 높은 대화가 불가능하다.
? 묘향산에 오른 적이 있다. 상원암에 묵는데 밤새도록 달빛이 낯처럼 밝았다. 창문을 열고 동쪽을 바라보니 암자 앞으로 하얀 안개가 자욱한데, 위에서 달빛을 받아 마치 수은의 바다 같았다. 그러데 바다 아래서 코고는 소리가 울렸다. 절의 중들이, 아래 세상에 천둥에 큰 비가 내린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며칠 뒤 산을 나서 안주에 이르렀더니, 과연 그날 밤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평지에도 물이 한 자 높이로 흘렀으며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 왔다고 했다.
余嘗登妙香山. 宿上元庵, 盡夜月明如晝, 拓窓東望, 庵前白霧漫漫, 上承月光, 如水銀海, 海底殷殷有聲如鼾鼻. 寺僧相語曰, 下界方大雷雨矣. 旣數日出山, 至安州, 前夜果暴雨震電, 平地水行一丈, 漂民廬舍.
⇒ 시간 다음에는 공간을 말했다. 상원암은 구름 위에 있는 암자이기에, 구름 아래 폭우가 쏟아져도 이곳에서 보는 운해는 달빛을 받아 눈부시다. 온 세상에 비가 오고 있다고 믿는 아래 사람들은 상원암의 광경을 상상하지 못한다.
? 나는 뜨거운 마음이 일어 말고삐를 잡고 가며 생각했다. 그날 밤 나는 구름과 비 위에서 달빛을 품고 잤던 것이로구나. 태산에 견주면 묘향산이야 개미두둑 정도인데도, 그 높낮이에 따라 이렇게 세상이 달라지니, 성인이 본 천하는 얼마나 클까! 설산에서 고행한 석가는 공자 3대가 아내를 내쫓고, 공자의 아들 리가 요절하고, 공자가 魯衛에서 쫓겨난 일을 미리 안 것이 아닌데도 이러한 일들의 부질없음에 환멸을 느껴 출가하였다. 흙 물 바람 불같은 물질은 스쳐 지나면 모두 부질없으니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다.
余攬轡慨然曰, 曩夜吾在雲雨之外, 抱明月而宿矣. 妙香之於泰山, 纔㟝嶁耳, 其高下異界如此, 而况聖人之觀天下哉! 彼雪山苦行者, 非能逆覩於孔門之三黜, 伯魚之早沒, 魯衛之削迹, 而爲此出世也. 誠以地水風火, 轉眼都空, 此可寒心.
⇒ 사람들은 공자가 본 천하의 크기를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왜 석가가 출가하여 고행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공자의 말은 무조건 옳고, 석가의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라고 들었고, 그걸 그대로 되 뇌여 왔기 때문이다. 생각이 판에 박혀 있는 사람들이다.
? 저 서양인들은, 공자와 석가의 견해란 땅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지구를 어루만지면서 하늘을 걷고 별들을 쓰다듬으며 나아가는 자신들의 견해가 그 둘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런데 낯선 곳에 와서 외국어를 배우고 늙을 때까지 글을 익히며 불후의 사업을 꾀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들은 그때그때 지나가는 현상에 속하고, 그러한 현상은 끊임없이 이어진다면 예전에 기대어 학문으로 삼았던 데에서 아무것도 거둘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애써 글을 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유가의 이단 배척론은 찌꺼기를 주운 것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또 힘들여 斥佛을 본받아 불씨의 천당지옥 설이 술지게미를 주워 먹은 것임을 기뻐하게 하려 함이다. … 까닭일 뿐이다.
彼又謂聖人與佛氏之觀, 猶未離地, 則按球步天, 捫星而行, 自以其觀勝於二氏. 然異方學語, 白頭習文, 以圖不朽者, 何也? 葢以耳聞目見而屬之過境, 境過而不已, 則昔之所憑以爲學問者, 亦無所取徵. 故强爲著書, 欲人之必信見吾儒闢異之論, 則綴拾緖餘. 强效斥佛, 悅佛氏堂獄之說, 則哺啜糟粕. … 故耳.
⇒ 彼의 지시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치 않은데, 성인과 불씨를 하나로 묶어 대상화하고 있음을 보면, 이 글 안에서 남는 것은 泰西人 밖에 없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상이 유불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중국에 와서 그 말을 배우고 글을 짓는가? 그 우위를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 이제 나는 이번 걸음에 …
今吾此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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