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擇細流

유협전과 사마천의 슬픔

검하객 2012. 8. 15. 12:59

 

  이번 방학에는 딱히 읽었다고 할 만한 책이 없다. 게을리 보낸 것도 아닌데 말이다. 7월 27일 답사를 떠나기 전에는 유몽인과 수호전 논문 때문에 겨를이 없었고, 8월 2일 돌아온 뒤에는 폭염 속에서 투고한 세 편 논문 뒤처리하느라 다 보냈다. 그나마 貨殖, 游俠, 滑稽를 읽은 것이 위안이다. (姚祖恩, 史記菁華錄) 그 날은 점심도 거른 채 눈이 빠지도록 하루종일 그 글만 읽고 생각했다. 세 편의 글은 열전 70편 가운데서도 꼬리 부분에 자리하였고, 나머지와 달리 의론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단언컨대 열전의 백미는 이중에서도 화식과 유협이다. 나머지 글들은 대개 敍事로 그치고 말았지만, 이 세 편은 敍事와 議論을 갖추었다. 역사 사실과 사마천의 정서는 물론이고, 그의 정치경제철학이 초석으로 깔려 있다. 그것은 그의 폭넓은 식견과 예리한 통찰이 개인의 절절한 경험과 낭만적 상상과 만나 탄생한 것이다. 土와 信이 맨 뒤에서 오행과 오륜의 저울추가 되는 것처럼, 이 세 편의 글은 『사기』 전체의 토대를 이룬다. (2012.8.15)

 

 

 「유협전」은 한비자의 “儒以文亂法, 俠以武犯禁.”의 인용으로 시작된다. 儒와 俠을 대등한 자리에 놓은 것이다. 세상에서 俠은 儒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유자들이 俠을 경시하여 그들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의 평가는 절대적인 것이 못된다. 原憲과 季次는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사후 400년이 지나도록 그들의 향기는 짙어지기만 한다. 그렇다면 俠의 가치 또한 평가에 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俠은 그 행동이 正義를 따르지는 않지만, 其言必信, 其行必果, 已諾必誠에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남의 어려움에 달려가면서 생사를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不矜其能, 羞伐其德하니 내세우기에 족한 것이 있다. 게다가 위급한 상황이란 인생에 때때로 일어나니, 이들의 도움을 입지 않을 수가 없다. 성현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도 불시에 위급함을 당하거나 곤란을 겪었으니, 속세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何知仁義, 已嚮其利者, 爲有德.” “竊鉤者誅, 竊國者侯, 侯之門, 仁義存.” 그렇다면 拘學보다는 선비가 곤궁할 때 목숨을 맡길 수 있는 포의의 俠이 가치 있지 않은가!

 

 

  옛날의 布衣의 俠, 閭巷의 俠, 匹夫의 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儒墨이 모두 배척하여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秦나라 이전의 필부지협들이 모두 인멸되어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甚恨) 한나라 초에 朱家, 田仲, 王公, 劇孟, 郭解 등이 있었다. 때로 법망을 거슬렀지만, 깨끗하고 겸양하여 일컫기에 충분함이 있다. 名不虛立, 士不虛附. 세력을 만들어 돈으로 가난한 자를 부리거나, 재미로 약자를 괴롭히는 작태를 이들은 더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이들을 暴豪와 똑같이 취급하니 슬프다. (悲)

 

 

  郭解는 사마천과 동시대 사람이다. 체구가 작았지만 정채롭고 사나웠으며 술을 마시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 죽인 사람이 많았고, 남을 위해 원수 갚기, 도둑질, 도굴, 화폐 위조 등 불법을 저지른 것을 헤아릴 수 없다. 다행히 처벌을 받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는 바뀌었다. (折節爲儉, 以德報怨, 厚施而薄望. 振人之命, 不矜其功.) → 사마천은 이를 매우 긍정적인 변화로 이해했지만, 혹 그 교묘한 실상을 보지 못한 건 아닐까? 소년들이 그의 행동을 사모하여 번번이 그를 위해 원수를 갚으면서도 알려지지 않도록 했다. → 정말 이게 대가 없는 자발적인 행동이었을까? 사마천이 너무 순진하고 낭만적이었던 건 아닐까? 누이 아들의 죽음에 대한 처사.

 

 

  곽해의 출입에는 사람들이 모두 피했는데 →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그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무리 중에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말렸다. 관리에게 부탁하여 여러 차례 徭役을 면제해주게 했다. → 관리와의 유착, 자연스러운 일로 돈이 오갔을 것. 그 사실을 알고 뒤에 찾아와 사죄했다. 장안의 부호들을 모두 茂陵으로 이주하게 했다. 衛장군이 곽해를 위해 무제에게 말했으나, 무제가 말했다. “포의의 신분인데 장군으로 하여금 자기를 위해 말하게 하였으니 그의 집이 가난한 게 아니다.” → 무제는 똑똑했다. 할 수 없이 이사가는데, 전송하는 사람들이 수만금을 내놓았다. →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를 집행한 관리 楊季主의 아들을 조카가 죽였고, 그 집안에서 고소하자 사람들이 또 대궐 아래에서 그를 죽였다. → 공권력을 위협하는 수준의 조직과 자금을 갖추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제가 체포령을 내렸다. 한참 만에 체포했다. (한 줄 확인)

 

 

  그 전에 관리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어떤 객이 곽해를 칭찬했는데, 자리의 유생이 이 말을 듣고 곽해를 비난했다. “郭解專以姦犯公法, 何謂賢解.” →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객이 이 유생을 죽이고 혀를 잘랐다. 곽해는 그가 누군지 몰랐고, 죽인 자도 잠적했다. → 이런 사건이 얼마나 많았던가! 사마천은 일면 매우 감상적이고 낭만적이었다. 관리는 곽해의 무죄를 보고했으나, 어사대부 公孫弘이 말했다. “解布衣爲任俠行權, 以睚眦殺人, 解雖不知此, 罪甚於解殺之, 當大逆無道.” 멸족을 명했다. → 비난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였는데, 곽해와 살인자 사이에 어떤 약속도 없고 더구나 둘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이다. 있기 어려운 일이거니와 혹 그렇다고 해도 이는 위정자에게는 무서운 위협이 아닐 수 없다.

 

 

  太史公曰, 吾視郭解, 狀貌不及中人, 言語不足採者. 然天下無賢與不肖, 知與不知, 皆慕其聲, 言俠者, 皆引以爲名. 諺曰, 人貌榮名, 豈有旣乎. 於戱惜哉!

 

 

  ⇒ 游俠은 권력과 지위가 없는 여항의 협객이다. 이들은 목숨 걸고 위급한 자를 도와주는데, 자기들의 행적을 내세우거나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행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일종의 지하권력이다. 그들은 공권력이라는 거대한 태양이 만들어낸 그늘에서 탄생한 버섯권력이다. 그들은 공권력과 유착하여 그 보호 아래 막대한 이익을 얻었으며 불법을 자행하였는데, 겉을 인의와 도덕으로 포장했을 뿐이다. 사마천은 절대 위기에서 아무의 도움을 받지 못해 궁형을 받았다. 속사정이 어떻든 간, 그의 눈에 목숨 걸고 끝까지 남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사람은 매우 특별하게 보였을 것이다. 더구나 독서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뒷골목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기 마련이다. 곽해는 사마천과 동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지난 시대 포의지협이 지식인들(유가나 묵가)에 의해 기록되지 않아 인멸된 것을 안타까워했고, 곽해의 죽음에도 크게 마음 아파했다. 한번 마음먹으면 이해를 따지지 않고, 법질서를 개의치 않으면서 철저하게 도와주고 마는 그들의 행태가 특별하게 다가왔던 까닭이다. 결과적으로 사마천은 유협이라는 특수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이후 유협은 『수호전』이 되고, 권겸산이 되고, 시라소니와 장총찬이 된다. 「유협전」은 열전의 말미에 꼬리처럼 붙어있지만, 사실 여부를 따지는 역사학의 관점에서는 존재감이 미미하겠지만, 그 뒤 서사의 장강대하가 되니 문학사의 차원에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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