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언어는 이름이자 지식이며 세계이다 (고라니)

검하객 2016. 7. 14. 12:26

 모든 언어는 사물에 대한 이름이다. 여기서 사물이란 사슴, 돼지, 까치 등 물리적 실체일 수도 있고, 강박신경증, 호모사케르, 구조적 폭력, 법 위의 권력 등 지각 불가능하 역사와 사회와 심리의 비물리적 현상일 수도 있고, 사랑은 시적 기억이나 당신의 미소는 나비의 날개짓 같은 은유일 수도 있다. 이름이 없으면 사물도 없다고 한다. 이름의 크기와 종류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의 지적 규모와 깊이를 나타낸다. 인간에 대한 언어가 빈약하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궁핍한 것이다.  

  우리 아파트 단지 뒤에는 꽤 넓은 녹지가 남아있다. (슬프지만 곧 개발될 것이다) 여기에는 꽤 여러 마리의 고라니가 살아, 나는 종종 고라니를 보러 테라스로 나가곤 한다. 새끼 고라니 한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한참을 넋놓고 쳐다보다가, 水深을 몰라 무밭으로 알고 바다에 내려앉았던 공주같은 나비가 떠올랐다가, 지난 학기 수업 중, "요즘 한국의 산에는 멧돼지와 고라니가 많다."라는 말을 전달하려다가 '고라니'에서 막혔던 기억이 났다. 멧돼지는 野猪라고 하면 되지만, 고라니를 뭐라고 한담?

 논문을 찾아보니, 만족스럽지 않다. 편수도 많지 않을 뿐더러 시각도 협소하다. 명칭에 대해서는 원병휘/이해빈, <한국산 포유동물의 생태에 관한 연구> (동국대 논문집, 1969)가 전부이고,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의 내용 중 대부분은 여기서 가져온 것이다. 사냥법이나 피의 약효와 같은, 아무런 시의성이 없는 정보만을 나열하고 있다. 약 50년이 지나는 사이에 한국의 산천에는 고라니의 개체수가 수백 수천 배로 늘었지만, 연구는 아주 소박하고 검소한 셈이다. 우리는 자주 마주치는 고라니를 잘 모른다. 그러니 어느날 갑자기 고라니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지는 모든 현상을 우연에 맡긴다.

  이 논문에 따르면  고라니의 다른 이름은 보노루, 복작노루이다. 영어로는 Korean Water-Deer, 일본어로는 K1bannoru,  Gasho라고 한단다. Hydropotes mermis argyropus HEUDE는 학명인가? Chinese Water-Deer란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도 고라니가 있음에 틀림없다. (원산지의 하나가 중국이다.) 그렇담 한자로는 뭐라고 표기했을까?  옛날에는 딱히 고라니를 표기하는 한자가 없었던 듯하다. Chinese Water-Deer로 百度에서 검색하면, 中国水鹿을 소개하고 속칭 獐, 别名은 土麝、香獐, 원산지는 중국 동부와 조선반도라고 설명했다. 올린 사진도 고라니가 맞는데, 中国水鹿은 근래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우린 아직 고라니를 모른다.


  <농작물 피해 주는 천덕꾸러기? 고라니 멸종되고 후회 마세요> 한국일보 2017. 6. 30 (김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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