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로 지리

영평성, 난하, 이제묘

검하객 2017. 7. 10. 01:14

  청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豆棚閑話"에는, 대개 163,40년대를 배경으로 고형화된 고사를 해체하고 다시 쓰기한 12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자로 艾納居士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 없다. 일곱 번째 이야기인 <首陽山叔齊變節>은, 함께 은거했던 형제 중 숙제의 하산에 대한 논란을 담고 있다. 고민 끝에 숙제는 자신의 하산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이번의 하산이 틀리지 않았으며, 공명을 이룬 뒤 다시 서산에 가서 형의 유골을 수습해도 늦지 않겠다고 확신했다. 自信此番出山却是不差, 待有功名到手, 再往西山收拾家兄枯骨, 未为晚也." 이는 또 뒷날 백이숙제가 병칭되지 않고, 주로 백이로만 일컬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2천 년 가까이 유교적 도덕의 화신으로 칭송받아왔던 백이숙제에 대한 재형상화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 이보다 200년 전 성삼문도 이제를 비판했지만, 이는 그 도덕의 강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층위가 다르다 - 

  "열하일기", <관내정사> 7월 27일 조에는 백이숙제 숭상에 대한 일화가 실려 있다. 박지원 일행이 난하 가의 이제묘를 방문한 것은 26일이었다. 연암은 26일 기사 뒤에 '이제묘기', '난하범주기', '사호석기' 세 편의 독립 기사문을 배치했다. 그리고 27일의 노정을 소개하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1765년 경 한양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소개했는데, 그 시선이 자못 풍자적이다. 허구이기는 하나, 고사리를 먹다가 굶어죽은 백이숙제의 신에게 고사리무침을 제수로 올렸다는 조선 사신들의 연행 풍속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박지원은 짐짓 일화를 소개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풍자와 조롱의 시선은 배면에 숨겨두었다. 1935년 노신이 지은 '采薇' (故事新編)는 이러한 전통에서 다시 쓰기를 통해 백이숙제에 대한 유가의 허위의식을 폭로한 작품이다. 

  조선 사신의 이제묘 탐방은 관례처럼 지속되었고, 건물의 배치와 구성 등에 대한 기사는 매우 상세하여 복원도의 토대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시대별 변천의 과정도 어느 정도 재구할 수 있는 정도이다. 백이숙제는 오랜 세월을 거쳐 인물상이 빚어졌고, 성인화되었고, 신격화되어 숭배되었으며,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조선 사신들의 발길과 숭배로 북적였던 이제묘 자리에는 공장들이 들어서, 그 터조차 남아있지 않다. 최근 10년래 일어난 현상이니, 이제 그들은 풍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무시, 외면 당하고 있는 셈이다. "두붕한화"와 "고사신편" 속 이제 형상에 대해서는 2002년에 나온 두 편 논문, <계보학적 측면에서 접근한 백이숙제 고사 연구>와 <두붕한화 제 7칙 수양산숙제변절,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에 대하여> (김민호)에서 논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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