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평대군 이요는 1656년 9월 19일 자 기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별산점(鼈山店)을 지났다. 별산점은 몹시 번성했다. 서쪽으로 5리가 되는 곳에 두 가닥 큰길이 있으니, 하나는 곧 운류하(運流河)의 큰길이요, 하나는 곧 어양(漁陽)의 큰길이다. 어양로로 해서 가다가 산언덕을 지나는데, 석인(石人) 둘이 있었다. 제도는 마치 우리나라 파산(坡山)에 있는 석불(石佛)과 같았으나 조금 작았다. 언덕에 올라 어양을 내려다보니 무너진 보루(堡壘) 속에 유독 독락사(獨樂寺)만이 높다랗게 솟아 멀리 구름에 닿아 있었다. [過鼈山店, 鼈山甚盛. 西五里有二條大路, 一迺運流河大途. 一是漁陽大路, 從漁陽路行. 歷山阿二石人, 制如吾東坡山之石佛而差小矣. 登阿俯臨, 漁陽毀壘中, 唯獨樂寺巍巍亭亭, 逈齊雲霄.]
玉田을 지나 계주로 들어가는 길을 정확하게 안내하고 있다. 대규모 도로가 건설되고 도시가 확대 개발되면서, 이 부근의 연행 경로를 찾기가 쉽지 않다. 조선의 사신들이 이용했던 길은, 鼈山店(지금의 別山)에서 5리를 더 가서 서북쪽으로 꺾어져 翠屛山 아래를 지났던 길이다. "수호전"에서 석수의 의도에 따라 양웅이 아내 潘巧雲과 시비 迎兒를 잔혹하게 죽이고 양산박으로 달아나는 공간으로 설정된 곳이기도 하다. 취병산에 이르기 전 마을들은 대규모 개발로 인해 모두 철거되고 있는 중인데, 여기 大雲泉寺와 小雲泉寺가 있었다. 우리 연행록에는 雲禪寺, 또는 雲田寺로 나온다. 이 다음에 지났던 漁陽橋는, 수로와 수량의 변화가 심해 찾기가 어려워졌다.